정 일 근

은현리 대숲이 비에 젖는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잉크병에

녹색 잉크가 그득해진다

죽죽 죽죽죽 여름비는 내리고

비에 젖는 대나무들

몸의 마디가 다 보인다

사랑은 건너가는 것이다

나도 건너가지 못해

내 몸에 남은 마디가 있다

젖는 모든 것들

제 몸의 상처 감추지 못하는 날

만년필에 녹색 잉크를 채워 넣는다

오랫동안 보내지 못한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사람

푸른 첫줄 뜨겁게 적어놓고

내 마음 오래 피에 젖는다

은현리 고향집 대숲에 내리는 여름 비를 바라보며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생각에 젖어듦을 본다. ‘사랑은 건너가는 것’, ‘건너가지 못하고 몸속 깊은 곳에 마디와 상처를 감추고 산다’고 말하며 시인은 자연과 사물의 아픔과 상처를 말하며 자신이 건너가지 못한 사랑의 상처와 아픔을 가만히 꺼내 보는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