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다말다 했던 하바롭스크 가는 길. 이날 달린 거리는 ‘직진만’ 1천25㎞였다.
비가 오다말다 했던 하바롭스크 가는 길. 이날 달린 거리는 ‘직진만’ 1천25㎞였다.

◇ 다시 시베리아를 달리다

모스크바를 떠나 처음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토바이든 차든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났던 이들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는다. 시베리아를 지나는 고생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고, 그 시간 동안 유럽에서 머무르며 여행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처음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계획했을 때도 여느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최서단 포르투갈 호카곶까지 갔다가 스페인에서 오토바이를 배로 보내고 여유롭게 파리나 베를린 같은 유럽의 대도시에 가서 지내다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다. 왕복한다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2018년 계획했던 여행이 러시아 월드컵으로 틀어지고(아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을 예약할 수 없었다.) 2019년 다시 떠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왕 다녀오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오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다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건 힘들 테니 이번 기회에 후회 없이 달려보자 싶었다.

처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할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담담했다. 느긋하게 무리하지 않고 달리며 처음 달릴 때 놓쳤던 걸 자세히 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다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결국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겨 견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겨 견인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문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까지 8월 내내 러시아 곳곳은 이상기후로 몸살을 알았다. 유럽의 폭염을 벗어나니 시베리아에선 폭우가 자주 쏟아졌다.

그리고 10년이 된 로시가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그동안 관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이와 짧은 기간 동안 달린 거리를 생각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모스크바에서 2천500㎞쯤 달려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그동안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진동을 흡수하는 뒷바퀴 고무 댐퍼와 베어링, 체인, 스프라켓 모두 교체해야 했다.

노보시비르스크의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당장 부품이 없어 일주일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만 듣고 고민에 빠졌다. 부품이 오길 기다렸다간 9월이 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750㎞ 떨어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부품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무조건 짐을 챙겨 출발했다. 다행인 것은 크라스노야르스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 편에 있다는 것.

 

러시아 트럭 기사들이 많이 마시는 에너지 드링크 ‘번’.
러시아 트럭 기사들이 많이 마시는 에너지 드링크 ‘번’.

◇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멈춰서다

결국 크라스노야르스크 가는 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뒷바퀴 휠 베어링이 마모되어 파편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시베리아 허허벌판에서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러시아를 벗어나기 직전 미끄러져 오토바이가 크게 부서진 이후 또다시 큰 난관에 부딪힌 셈. 어떻게든 달려보려 했지만 이대로 주행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토바이는 길가에 세워놓고 타박타박 걸어서 근처 카페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영어도 통하지 않고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어서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오토바이가 고장 나서 싣고 갈 트럭이 필요하다고. 문자 이전에 그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런 상황에서 실감할 줄이야.

 

집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건 ‘FBR모토’의 실력 있는 미캐닉 빅토르 씨 덕분이었다.
집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건 ‘FBR모토’의 실력 있는 미캐닉 빅토르 씨 덕분이었다.

카페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앞 테이블에서 명함을 찾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있는 견인트럭 기사에게 연락하는 중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10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캐메로보였다. 견인트럭이 오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견인비를 흥정하고(1500루블) 캐메로보까지 가는 데만 또 3시간(오토바이를 싣고선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캐메로보에 BMW 오토바이를 고칠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또 몇 시간을 보냈다. 정비소를 몇 곳이나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견인트럭 기사 아저씨(안타깝게도 통성명했으나 기억하지 못한다)가 아니었다면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을 것이다. 예정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그가 여러 곳 수소문해서 오토바이를 내려준 곳은 ‘FBR모토’였다. 여러 곳이 문제였지만 뒷바퀴 휠 베어링이 가장 큰 문제였다. 3개의 베어링이 들어가는데 2개는 규격품이 있지만 1개가 모자랐다. 미캐닉 빅토르 씨가 근처 자동차 수리점에 가서 딱 맞는 베어링을 찾아와선 나에게 “럭키 가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을 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난관에 빠질 때마다 항상 선한 사람들이 나타나 해결해주는 건 나의 복이다.

국경을 넘어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마다 항상 그랬다. 단 한 번도 물건을 도둑맞은 적도 없고 누구에게 속은 적도 없다.

마다가치에서 묵었던 숙소 침대. 근처 도로 공사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묵는 곳이었다.
마다가치에서 묵었던 숙소 침대. 근처 도로 공사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묵는 곳이었다.

◇ 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다

‘FBR모토’에서 말썽이 생길만한 모든 부품을 교체하고 난 뒤 캐메로보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진 날씨 외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온전히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를 약 3천㎞ 남겨둔 치타에 도착해서 느긋하게 여행하겠다는 나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일주일에 딱 한 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떠나는 배가 있는데 추석을 한 주 앞두고 떠나는 배가 취소되었다는 통관대행사의 메일을 받았다. 그 전에 떠나는 배를 타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하고 그 다음에 떠나는 배는 추석 귀경 행렬과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다.

푸틴 대통령이 참석하고 여러 국가의 고위 관계자가 참여하는 동방경제포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탓이었다. 딱 5일을 남겨놓고 치타에 도착했으니 통관대행회사에 오토바이를 입고하는 날을 따지면 무슨 일이 있어도 4일 안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야만 했다. 하루 700㎞는 무조건 달려야만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 4일 동안 거의 내내 비를 맞은 건 여행의 피날레 치곤 꽤나 스릴 있고 잔인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니 마지막 힘까지 탈탈 털어서 쓰고 쭉정이만 남은 기분이었다. 처음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종일 잠만 잤다. 숙소 근처 한국 영사관이 있어 지날 때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날이 기억났다. 면허증 번역 공증서를 받으러 갔을 때 영사님이 직접 나와서 “안전하게 다녀오라” 당부했었다. 2018년 떠났던 여행자가 횡단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이런저런 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나니까. 지난 100여 일이 꼭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 같다. 다시 출발하기 위해 숙소에서 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출발할 때 들떴던 감정은 사라졌고, 시원하고 섭섭한 마음과 마냥 헤벌쭉해서 달리다 (통장 잔고를 포함해) 탈탈 털려버린 것들을 어떻게 채워 넣나 하는 걱정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리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도 없으니 언제나처럼 내일 걱정은 내일, 모레 걱정은 모레 하는 걸로.

아직 집에 돌아갈 일이 남았지만 건강하게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다. 100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달린 거리가 약 3만8천㎞, 그야말로 ‘주마간산’이나 마찬가지인 여행이었다. 이런 여행에서 깊이를 찾는 건 무리가 당연하다. 처음 세웠던 계획은 어느 도시에 머무를 때마다 서점과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삶의 안목을 높이고 싶었다. 하지만 먹고, 자고, 달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빠듯한 경비를 아껴 쓰느라 무엇이든 마음껏 해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제 불혹이 되었을 때 세웠던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꿈(칭다오에서 싱가포르까지 7개월, 일본에서 한 달, 유라시아 횡단 4개월)을 이뤘으니 돌아가면 엉덩이 들썩대지 말고 뭐든 해야겠구나 싶다. 그런데 왜 시간은 언제나 돌아보기 무섭게 빠르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조경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