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며칠 전 별세했다. 그는 김일성의 남침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불굴의 투혼으로 지켜낸 구국의 영웅으로 길이 청사에 남을 군인이었다. 일제치하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전력이 있어 좌파 진영에서는 친일파로 매도를 하지만, 그것은 그의 공적에 비하면 옥의 티에 불과한 것이었다. 김일성이 얼마간 항일운동의 전력이 있다지만 북한의 전 주민을 꼭두각시 노예로 전락시키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것과는 참으로 대비가 되는 일이다. 굳이 공과를 따지자면 백선엽 장군은 과 하나에 공이 아홉이요, 김일성은 공 하나에 과가 천이고 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 장군의 타계 하루 전날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을 했다. 지난 몇 년간 비서로 있으면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경찰에 고소장을 낸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 오거돈 부산시장이 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할까. 아마도 오랜 세월 인권변호사로, 특히 여성인권의 대변자를 자처해온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상반된 행각이 탄로나자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심정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성추행범들과는 달리 박 시장의 경우 선도적 페미니스트로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었기에 죽음 말고는 도피할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두 죽음에 대한 이 정권의 태도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될 일이 아닐 수 없다. 박 시장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부와 여당이 즉각적으로 애도를 표하고 서울시장(葬)으로 시청 앞에 빈소를 차리는 반면, 백 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뭉그적거리다가 비난이 일자 마지못해 국군장도 아닌 육군장으로 하고 뒤늦게 조문을 하는 행태를 보였다. 광화문의 분향소도 일부 뜻있는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차린 것이라 한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의 사투가 아니었으면 한반도는 김일성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지금쯤 우리는 김정은을 절대존엄으로 떠받들며 살고 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궁지에 몰려 선택한 자살은 비겁한 도피일 뿐이다. 박 시장이 남긴 짤막한 유서에도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는 것으로 보아 양심의 가책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오로지 그동안 쌓아온 나름의 업적과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걸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죽음으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위선과 가식과 죄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양심이고 도리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죽음을 미화하고 피해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몰아가려는 자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죽음을 두고 극명하게 엇갈린 민심이 양쪽 분향소 앞에 줄지어 선 모습은, 이 정부가 조장하는 극단적인 대립 양상의 단면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행여 망국의 조짐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