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대수필가
윤영대
수필가

온종일 내리던 장맛비가 살짝 그치고 창 넘어 들어오는 바람이 왠지 시원해서 오랜만에 마을 뒷산을 산책하고 싶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다가 우편함을 보니 엽서 같은 것이 있기에 뭘까? 하고 꺼내보니 색다른 엽서다. POST CARD 글자 옆에 전자우표가 붙어있고 보내는 사람은 ‘外洞휴게소에서 河<78A4>’(하영-나의 아호)이고 받는 사람도 우리집 주소에 내 이름으로 되어있다. 내 글씨, 내가 보낸 엽서다. 어! 내가 언제 경주 외동휴게소를 갔었지? 이상하여 뒷면을 보니 휴게소 사진 옆에 간단한 글이 있다. ‘비 내리는 남해여행, 고속도로 위 휴게소가 예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동행하는 친구들도 좋고, 모두 즐겁다. 2019년 7월18일’

어! 작년이네. 그런데 왜 1년 후 이제야 오지? 아, 생각난다. 작년 이맘때 친구들과 남해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포항-울산 고속도로를 달려 남해 독일마을을 돌아보려는 여행이었지. 휴게소에 잠깐 들러 커피 한잔하며 둘러보니 마침 입구 쪽에 ‘1년 후에 받아보는 편지함’이 있기에 엽서 한 장을 얻어 간단히 적어 넣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뜻밖의 엽서를 받고 보니 그날이 새롭다. 소인(消印)을 살펴보니 발송일이 2020.07.08.이고 470원의 요금도 찍혀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는 마음으로 써넣었는데 그것을 모아두었다가 잊지 않고 돈 들여 1년 후에 보내 주다니 외동휴게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1년 후 받은 엽서의 기억은 또 있다. 몇 해 전 거실 탁자 위에 제주도 풍경의 그림엽서가 한 장 있기에 익숙한 풍경이라 그냥 선전물이겠거니 하고 제쳐 두었는데 다음날 다시 정리하다가 언뜻 보니 나의 글씨였다. 그 해는 제주여행이 없었는데 의아했다. 세계자연 경관 7대 명소를 돌며 서귀포의 물결을 본다는 찬사에, 보내는 사람은 ‘제주올레길7번’이고 받는 사람은 ‘아내에게’로 적혀있었다. 그 당시도 1년 전에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서 한 바퀴 돌았었는데, 그때 보낸 엽서가 집안 구석 어디 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났구나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엽서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쓴 날짜는 11월13일인데 소인은 11월6일로 되어있다. 우체국 소인은 틀림없을 텐데 내가 1주일을 잘못 알았나? 다시 뒷면을 보았더니 아래쪽에 다음과 같이 인쇄되어있었다. ‘1년 후에 보내는 편지-서귀포 대륜동 주민자치위원회’.

그제야 또렷이 생각났었다. 서귀포 7번 올레길을 걸어 외돌개를 지나 내려오는 개울 옆에서 만난 빨간 우체통과 안내판, 그곳에 비치된 엽서에 사연을 써넣으면 1년 후에 보내 준다는 설명을 읽고서 설마 하면서 써넣었던 기억이 새로웠었던 적이 있다.

1년 후 받아보는 느린 엽서가 아니어도 여행지에서 나에게 보낸 또 다른 엽서들도 내 기억 속의 여정을 되새기게 한다. 울산 간절곶에서 일출을 보고 해변 바위 위의 커다란 빨간 우체통에 넣었던 행복엽서도,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다가 지친 몸을 쉬며 장터목 산장에서 부친 단풍엽서도 받아보았고, ‘토지’의 숨결을 찾아 원주문학기행을 갔을 때 박경리문학공원 북카페에서 적어 보낸 감사엽서도 있다.

이러한 엽신(葉信)을 보내는 취미는 해외여행 때도 만끽하고 있다. 관광하는 도시마다 거리의 기념품점이나 우체국이 보이면 그림엽서를 사서 그날의 여행에서 본 것 느낀 것들을 간단히 적어 부치고, 어떨 땐 호텔카운터에 부탁하거나 가이드에게 맡겨두면 고맙게도 잘 보내 주었다. 내가 즐기는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이러한 나의 취미를 잘 알고 있는 딸과 아들도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가끔 삽화까지 그려서 그곳의 관광엽서를 보내온다. 그러면 나의 마음도 따라서 그 여정을 훑어가곤 한다.

‘1년 후에 받아보는 편지’를 보내 주는 느린우체통은 누가 어떻게 매일매일 써넣어지는 엽서를 모아두었다가 꼭 1년 후에, 그것도 우편요금을 부담하고 보내 주는 것인지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서 기억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받아보는 한 장의 타임캡슐은 지난 흔적을 따라 두 번째의 여행을 하게 한다.

해 질 무렵 조용한 산길을 내려오는 나의 손에는 1년 전에 찾은 남해 보리암의 석불이 조용히 미소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