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인

그가 떠나면서 마음 들머리가 지워졌다

빛살로 환하던 여백들이

세찬 비바람에 켜질 당할 때

그 폭풍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절망하고 절망하고서 비로소 두리번거리는

늦봄의 끝자락

운동모를 눌러쓰고 몇 달 만에 앞산에 오르다가

넓은 떡갈잎 양산처럼 받들고선

꿩의 밥 작은 풀꽃을 보았다

힘겹게 꽃 창 열어젖히고 무거운 머리 쳐든

이삭꽃의 적막 가까이 원기 잃은 햇살 한 줌

한때는 왁자지껄 시루 속 콩나물 같았던

꽃차례의 다툼들 막 내려놓고

들릴락 말락 곁의 풀 더미에게 중얼거리는 불꽃의 말이

가슴속으로 허전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벌 받는 것처럼 벌 받는 것처럼

꽃 진 자리에 다시 써보는

뜨거운 재의 이름

시든 화판을 받들고선

병든 몸이 병과 함께 비로소 글썽거리는, 해거름!

차례는 순서를 가리키는데, 꽃대에 핀 꽃잎의 배열이나 꽃이 피는 모양을 꽃차례라 한다. 쓸쓸한 시간과 엄동이라는 절망의 시간을 지나면 화사한 봄꽃들이 피고, 그 꽃들이 지는 늦봄의 끝자락에 괭이밥 작은 풀꽃은 피어난다. 자연의 순리, 차례를 지켜 피어난 것이다. 시인의 관찰력이 예리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