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예술의 고장 영천의 3선현

포은 정몽주의 혼이 살아있는 영천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의 혼이 살아있는 영천 임고서원.

맑은 공기와 조용한 도심 풍경이 인상적인 영천시. 거기서 태어나 역사 속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삶은 모두가 눈여겨 볼만하다. 학문적 성취는 물론 기개와 지조까지 지킨 포은 정몽주(1337~1392), ‘조선 가사문학의 큰 별’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1561~1642), 화약 개발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최무선(1325~1395). 이들 모두의 고향이 영천이다. 영천시는 세 사람을 지칭해 “우리 고장의 3선현(三先賢)”이라 부르며 그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정몽주, 박인로, 최무선의 삶을 살펴본다는 건 오늘날 우리가 잊고 사는 곧은 충절과 맑은 예술정신을 돌아보는 행위에 다름없다. 그렇기에 간략하게나마 ‘영천 3선현’의 생애를 요약하고자 한다.

‘동방 성리학’의 큰 스승 정몽주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포은 정몽주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충절을 지킨 지조 있는 학자였고, 시묘살이 3년을 두 번이나 거듭한 효자였으며, 명나라와 일본의 우리가 아는 외국의 전부이던 시절 두 나라를 7번이나 다녀온 빼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러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포은의 스승 이색(1328~1396) 역시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상찬을 내놓은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영천의 임고서원은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소실된 건물은 1965년 복원됐고, 1999년까진 성역화사업도 진행됐다.

 

‘동방이학지조’라는 글귀가 새겨진 임고서원 입구의 석비.
‘동방이학지조’라는 글귀가 새겨진 임고서원 입구의 석비.

서원 입구엔 거대한 석비가 우뚝한데 거기 새겨진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라는 글귀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말 할 것 없이 ‘동쪽 나라 성리학의 큰 스승’이라는 뜻.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난 포은은 세 차례 이름을 바꾼다. 모친의 태몽에 난초가 나타났다 해서 몽란(夢蘭)이라 지어졌던 이름이 여덟 살 때 몽룡(夢龍)으로 바뀐다. 검은 용이 나무에 오르는 꿈을 꾼 게 개명의 이유였다. 우리가 아는 몽주(夢周)는 관례를 치르고 난 후에 얻은 이름. 앞서도 말한 것처럼 학식과 더불어 용기까지 출중했던 포은은 두둑한 배짱을 무기로 일본에 가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백성 수백 명을 석방시킨 능력 있는 외교관이기도 했다. 1377년의 일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되는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통해 보여준 고려에 대한 변함없던 충성심은 이미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을 터.

그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김인규의 논문 ‘포은 정몽주의 생애와 그의 학문관’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5천여 년 우리 역사 속에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충신과 열사가 있었지만, 포은 정몽주 선생만큼 후세에 영향을 미친 분은 없으며, 그 위상과 영향은 구한말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

영천에 간다면 임고서원은 물론, 일대에 조성된 포은유물관(주요 유물 소장)과 충효문화수련원(전통문화 및 예절 교육기관)에 가보길 권한다. 정몽주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영천시의 노력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노계문학관에 전시된 노계집(盧溪集) 판목.
노계문학관에 전시된 노계집(盧溪集) 판목.

예술가이자 무장(武將)이었던 박인로

조선의 가사문학은 우리가 세계 속에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예술의 한 장르다. 바로 그 가사문학의 정점에 섰던 게 노계 박인로였다. 그는 송강 정철(1536~1593), 고산 윤선도(1587∼1671)와 함께 가사문학의 거두(巨頭)로 불린다.

1561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난 노계는 총명함을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았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할 나이인 열세 살에 한시 ‘대승음(戴勝吟)’을 지어 동네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흥미로운 것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무예에도 관심이 적지 않았다는 것. 언필칭 문무겸전(文武兼全)했던 노계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예술가가 아닌 무장으로서 나라에 힘을 보탠다.

경전을 읽던 책상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공도 많이 세웠다. 그랬기에 원종공신이 되기도 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시를 쓰는 것은 멈추지 않았고, 고통 받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노계는 한음 이덕형(1561∼1613)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학문적 교류를 했고, 인간적 우의를 지켰다. 고향 영천으로 돌아온 노계를 한음이 찾아온 것도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그가 쓴 ‘선상탄(船上歎)’은 전란으로 인한 수난과 그것의 극복을 기원하는 절창으로 남아 있다. 당시로선 드물게 여든을 넘겨 장수했던 노계는 그의 품성과 문학적 기량을 알아본 영천 인근 벼슬아치들의 행사에 조용히 가서 시조 한 수를 읊어주는 낭만을 지닌 로맨스그레이(Romance grey)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짧게 약술한 손대현의 논문 ‘노계 박인로의 경제적 기반과 문학적 형상화’ 한 대목을 읽어보자.

“노계 박인로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이 일어난 혼란한 시기를 살다간 사람으로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으로 참전하였고, 과거 급제 이후에는 무관으로서 활동하였으며, 향리에 은거한 이후에는 유학에 침잠하면서 시조와 가사를 비롯하여 한시와 부(賦), 전(傳), 기(記) 등 다양한 형식의 많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문학사상 가장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됐다.”

영천 노계문학관에선 박인로의 생애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바로 근처에 노계의 위패를 모신 도계서원이 있으니 거기도 빼놓으면 안 된다. 문학관 전시실에선 조선가사문학에 담긴 예술혼을 확인해 보시길.

 

최무선의 애국의지를 이어가고자 만든 최무선과학관.
최무선의 애국의지를 이어가고자 만든 최무선과학관.

화약 무기로 왜구의 횡포 막은 최무선

고려 말. 늘상 밀리던 왜구와의 싸움에서 장쾌한 승리를 거둔 진포해전(鎭浦海戰·1380)과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1383)의 스타 최무선을 정성희의 ‘인물한국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려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해 국산화에 성공했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병기학과 군사학에 관심이 컸던 선각자 최무선은 중국어 사용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자연과학과 언어학 모두에서 돌올했다. 그 또한 박인로처럼 문무 양쪽을 경계 없이 오갔던 청년.

젊은 시절부터 국가를 위협하는 왜구의 약탈에 의분을 느끼던 최무선은 염초, 유황, 목탄을 혼합해 폭발력을 극대화시킨 화약에 주목했다. 그가 화약 분야 선진국이던 중국 배가 오가는 예성강 나루터를 헤맨 이유는 진토(塵土)에서 염초를 구워내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1376년 드디어 염초 기술자 이원(李元)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전수받은 최무선. 바로 그 시점이 고려가 ‘화약무기 보유국’이 되던 순간이었다.

그는 당시의 통치권자들에게 “무기용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췄으니,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관청을 세우자”고 간곡하게 청한다. 이런 최무선의 열정은 ‘화통도감’ 설치로 이어졌다. 화약무기의 개발과 실전에서의 사용은 앞서 말한 진포해전에서 100척의 배로 왜구의 전투선 500척을 불태워버리는 전과로 나타난다. 이어진 관음포대첩은 고려의 군사들이 일본에 대한 두려움을 온전히 떨쳐내는 계기가 됐다.

최무선과학관은 영천시가 여전히 최무선을 기억하고, 그의 애국의지를 계승하려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최무선, 정몽주, 박인로. ‘영천 3선현’의 빛나고도 뜨거웠던 행적은 앞으로도 영천의 자랑이 될 게 분명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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