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40년이 지났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만찬에서 차지철 전 경호 실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하여 군사 재판을 받았다. 그는 내란 수괴죄와 내란 목적 살인죄로 6개월 만에 전격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번 새로 입수된 재판 과정의 128시간의 녹음 테이프는 재판시의 김재규의 육성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 김재규 유족들은 이 테이프를 근거로 서울 고법에 재심을 청구해 놓은 상태이다. 그의 재심이 수용되어 10·26사건과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김재규 전 부장이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당시 서슬 퍼런 전두환 계엄 정국에서는 누구도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박정희 유신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그를 ‘민주 투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란목적 살인죄로 그의 측근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번 테이프에서도 김재규는 대통령 시해 목적은 ‘자유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통령이 되려는 과대망상’이라는 검찰의 주장에 ‘자유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한 혁명’이라 주장하였다. 내란 목적 살인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최후 변론에서도 자신의 행위가 독재를 막기 위한 혁명인데 어떻게 자신이 집권하겠다는 목적이 있었겠냐고 항변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만 보았던 시해당시의 상항을 그의 육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바로 옆 자리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똑똑히 모셔라’며 툭 치고 차지철 경호 실장에게 “이 버러지 같은 자식’하며 총을 쏘고 ‘1초’ 도 안 되는 순간에 대통령을 향해 꽝꽝 했다”고 진술했다.

이번 녹음에서 김재규의 유신헌법에 관한 입장은 재판장의 저지로 발언이 수차례 제지당했다. 그가 10월 유신을 권력내의 쿠데타라고 규정하여 그 부당성을 설명하려 한 것은 분명한데 그의 육성이 녹음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 중정 부장 김재규는 10·26 사건 전야 소위 부마사태의 현지를 방문하고 시국 수습책을 제시하려 했다. 이 문제로 경호 실장 차지철과 심각하게 다투었고 당시 박 대통령은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하면서 그를 질타했다는 내용도 녹음되어 있었다.

당시 경남대학 교수로서 마산에서 대학생들의 데모를 현장에서 목도했던 사람으로서 그 감회가 새롭다. 이번 김재규 재판의 재심의 수용여부는 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심의 요건인 새로운 증거인 53개의 녹음테이프가 나왔다는 점이다. 더구나 재판과정의 피고 김재규의 당시 발언이 공판시의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 점은 재심의 또 다른 주요 요건이 될 것이다. 이번 재심을 통해 10·26의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고, 김재규 전 부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재심의 수용여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역사에는 영원한 은폐도 비밀도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