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열린책들 펴냄
장편소설·각 1만4천800원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독특한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9)의 신작 장편소설‘기억’(전2권·열린책들)이 나왔다.

그는 ‘개미’, ‘뇌’ 등 독특한 소재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한국 독자들이 특히 사랑하는 외국작가 중 하나다.

베르베르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세계관이 이번에도 소설 곳곳에 넘쳐흐른다. ‘기억’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는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우리의 정체성에서 기억은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기억을 만들고 유지하는지를 전생이라는 장치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서양적 사고와 동양적 세계관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특징도 여전하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르네 톨레다노다. 센강 유람선 공연장 판도라의 상자에 갔다가 퇴행 최면의 대상자로 선택당한다. 최면에 성공해 무의식의 복도에 늘어선 기억의 문을 열 수 있게 된 르네. 문 너머에서 엿본 기억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그의 전생이었다. 최면이 끝난 후에도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한 기억에 시달리던 그는 몸싸움에 휘말려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할지 말지 고민하며 초조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편 르네는 자신에게 총 111번의 전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병 외에도 여러 기억의 문을 열어 본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전생은 놀랍게도 현대인이 ‘아틀란티스’라고 부르는 전설 속의 섬에 사는 남자 게브였다. 아틀란티스가 바닷속에 잠겨 버렸다고 알고 있는 르네는 어떻게든 게브를 구하고 싶어 하고, 판도라의 상자 무대에서 만났던 최면사 오팔이 르네의 조력자를 자처한다. 현생에서는 경찰에 쫓기며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전생에서는 대홍수가 예고된 가운데 과연 르네와 게브의 운명은?

누구나 한 번쯤은 전생 아니면 내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베르베르는 주인공 르네의 입을 통해 지금의 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틀란티스인 게브는 물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병, 고성(古城)에 사는 백작 부인, 고대 로마의 갤리선 노잡이, 캄보디아 승려, 인도 궁궐의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일본 사무라이까지…. 르네가 문을 하나 열 때마다 다양한 시대, 다양한 나라에서의 삶이 펼쳐진다. 그러나 기억의 문 뒤에는 보물과 함정이 공존하고 있다. 르네는 전생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속도감 넘치는 예측 불허의 모험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공연을 진행하는 최면사 오팔은 관객들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인간의 정체성에서 기억이 어느 만큼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기억을 만들고 지켜 나가는지가 이 작품의 화두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르네는 일상 생활에서는 건망증이 심해서 하던 이야기도 까먹을 정도지만, 최면을 통해 보통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심층 기억에 도달한다. 르네의 직업이 역사 교사인 것도 의미심장한데, 역사는 다시 말해 집단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르네의 아버지 에밀은 알츠하이머 때문에 점점 기억을 잃어 가는 반면, 최면사 오팔은 기억력이 지나칠 정도로 좋아서 괴로워한다.

그 외에도 ‘기억’의 등장인물들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기억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기억을 어떻게 대하는지 눈여겨 본다면 소설의 재미가 한층 깊어질 것이다.

작가는 전생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개개인의 기억은 소멸될 수 있지만 그 기억들이 모이고 모여 집단의 기억, 즉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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