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어,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구절인데….? 이 시구는 박인환이 1956년 봄에 지은 ‘세월이 가면’의 한 구절이다. 그런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박인환과 이름도 비슷한 가수 박인희가 부른 노래 ‘세월이 가면’의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훤칠한 키, 잘생긴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가운데서 최고의 멋쟁이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서울에서 줄곧 자라고 살았던 ‘명동 댄디보이’ 박인환의 문학관이 강원도 인제 산골에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그가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기에 인제군이 연고권을 주장하고 문학관을 지은 근거는 충분하겠다.)

1926년에 태어난 그는 1956년 3월에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출중한 외모에다 20대 초반인 1949년에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던 박인환의 요절은 문단을 포함한 당대 예술계에 큰 울림이 있었나 보다. 그가 세상을 뜨기 일주일 전 쯤 썼다는 시 ‘세월이 가면’은 곧바로 노래가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박인희의 노래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은 박인희가 처음 부른 노래가 아니다. 1956년 여름 신신레코드사에서 발매된 나애심의 음반을 시작으로 현인, 현미, 조용필에서 박인희까지 이 노래는 당대 최고 가수들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노래로 불리면서 처음 시의 ‘사랑은 가고’가 ‘사랑은 가도’로 바뀌었고, ‘과거’가 ‘옛날’로 달라졌다. 시와 노랫말이 똑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노래의 운율에 맞추어 몇 구절이 빠질 수도 있고, 조사나 어미 한 두 개쯤은 바뀔 수도 있다. 문제는 바뀐 노랫말이 마치 원래의 시인양 전도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에 있다.

‘사랑은 가고’를 ‘사랑은 가도’라고 바꾸어 노래를 불러도 되지만, 원래의 시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가고’와 ‘가도’는 확연한 의미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김소월은 그의 시 ‘왕십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드레 스무 날엔 / 온다고 하고 /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이 시에서 ‘가도 가도’를 ‘가고 가고’로 바꾼다면 소월이 노래하고자 했던 왕십리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과거’와 ‘옛날’도 그렇다. 지나간 시간이라는 큰 테두리는 같을지언정 풍기는 뉘앙스, 그 느낌은 같을 수 없다. 2002년 공쿠르 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옛날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과거와 옛날은 다르다는 말이다.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의 기억은 점점 흐릿해진다. 기록으로 남겨놓아도 그 기록을 옮기고 전하는 과정에서 변형과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 다반사이다. 역사의 정확한 기록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이비(似而非)에 주의하자. 종교에만 사이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