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성자 권정생 <하>

권정생 작가 생전 모습.

20세기를 양분한 이데올로기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들 수 있다. 두 이데올로기는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이지만, 근대의 자식으로서 공유하는 지점도 적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생산력주의이다. 생산력주의란 어마어마한 물질적 진보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성장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생산력주의는 산업적 근대성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대중의 물질적 행복을 제공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믿음이다. 물질적 진보를 향한 인간의 꿈으로 인해, 지난 세기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활의 편리와 풍요를 이룬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꿈은 반복적으로 악몽으로 변해 전쟁, 착취, 독재, 환경의 파괴 등을 불러왔다.

물질적 풍요를 절대적인 과제로 삼고 달려오는 동안, 인류는 자신 역시 지구라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했던 것이다. 그 결과 20세기에는 그 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연 파괴가 이루어졌으며, 그 속도는 광적으로 빨라지는 상황이다. 1990년부터 30년간 지구를 괴롭힌 오염 총량이 과거 2000년간 누적된 총량을 능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이다.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물질적 풍요만을 향해 달려간다면, 결국에는 유한한 지구 별이 망가진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결코 이 단순한 과학(아니 산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를 불편하고 공포스럽게 하는 코로나19는 이토록 명백한 진실을 깨우쳐 주려는 자연의 마지막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때때롱과 매매롱이 사는 ‘지금의 랑랑별’은 권정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토록 과학 기술이발전한 ‘5백 년 전의 랑랑별’을 극복한

‘지금의 랑랑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의 우리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는 ‘집안의 대장’으로 대우 받으며, 사람들은 호롱불을 켜 놓고 밥을 먹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화장실이 아닌 들판과 같은 곳에서 볼 일을 해결할 정도이다.

과거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권정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질적 풍요를 향한 인간의 광적인 신앙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존엄한 가치를 지니며, 인간만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편견은 존재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여러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권정생의 문학세계를 단편 동화를 주로 창작한 초기(1969-1980), 소년소설을 창작한 중기(1981-1990), 장편 판타지를 창작한 후기(1991-2007)로 나누고는 한다.(엄혜숙,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 소명출판, 2017, 340면) 초기의 작품들은 주로 기독교적 희생과 사랑의 사상을 담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강아지똥’을 꼽을 수 있다면, 중기의 작품들은 한국 근대사의 고통스런 체험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몽실언니’를 꼽을 수 있다. 후기에는 지구 생태계가 유기적 통일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생태주의에 바탕한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이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작가가 마지막으로 창작한 장편동화 ‘랑랑별 때때롱’을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2006년 1월-2007년 2월)되었고 작가가 별세한 다음해인 2008년에 보리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랑랑별 때때롱’은 지구에서 보면 북두칠성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랑랑별에 사는 때때롱과 매매롱이, 지구에 사는 새달이 미달이와 우정을 나누는 장편 판타지이다. 이 작품에는 세 개의 시공이 등장하는데, 첫번째는 새달이와 동생 마달이가 사는 지구이고, 두 번째는 때때롱과 동생 매매롱이 사는 지금의 랑랑별이고, 세 번째는 500년 전의 랑랑별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환상적인 요소는 랑랑별이라는 가공의 행성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크게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값싼 위안을 줄 수도 있으며, 이와는 달리 기존 현실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거나 새로운 현실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랑랑별 때때롱’에 등장하는 ‘500년 전 랑랑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성찰을 하도록 이끌고, ‘지금의 랑랑별’은 권정생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5백 년 전 랑랑별은 ‘지구의 미래’이고, 현재의 랑랑별은 ‘지구의 미래를 극복한 미래’인 것이다.

새달이와 마달이가 살아가는 지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환경오염이다. “지금 지구 나라는 온통 쓰레기뿐이고 사람 사는 곳이 못 된다.”고 이야기된다. 그 중에서 한국은 본래 물이 하도 맑아서 선녀들이 미역을 감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런 깨끗한 곳이 남아 있지 않으며 공기에도 먼지가 가득 섞여 있다. 환경오염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대표해서, 이 작품에는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왕잠자리가 등장한다. 왕잠자리는 “유리창을 날카로운 못 끝으로 찍 찍 긋는 듯한” 목소리로 눈물까지 흘리며, “다 죽었다! 다 죽었다!”라거나 “지구 별은 나쁘다, 지구 별은 나쁘다, 나쁘다, 나쁘다…!”라고 절규한다. 왕잠자리를 만난 이후 “새달이와 마달이는 목숨이 위태로우니 조심하여라.”는 때때롱의 편지를 받는데, 이것은 왕잠자리가 처한 상황이 새달이와 마달이에게도 곧 닥쳐올 것임을 암시한다.

때때롱은 왕잠자리에게 “랑랑별에서는 농약도 안 치고 쓰레기도 안 버린다.”며 랑랑별에 오라고 권한다. 새달이와 마달이는 맘껏 뛰어놀며 풀을 뜯어먹고 싶은 누렁이를 비롯한 흰둥이, 나비, 매미, 메뚜기, 온갖 벌레들, 개구리, 물고기들과 함께 랑랑별에 간다. 이후 새달이와 마달이는 ‘500년 전 랑랑별’과 ‘지금의 랑랑별’을 둘러보고 지구로 귀환한다.

‘5백 년 전 랑랑별’은 지금 인류가 물질적 풍요를 향한 꿈에 취해 별다른 반성 없이 살아갈 때, 마주하게 될 세상의 모습이다. “과학이 너무 발달”한 그곳에서는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한 로봇이 거의 모든 일들을 대신한다. 이 곳의 아이들은 좋은 유전자만 골라다가 만든 맞춤 인간이기에 하나 같이 잘나고 어른 같다. 이들의 몸 속에는 열 사람도 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로 있으며, 당연히 함께 사는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다. 모든 인간들은 기계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기에, 어른들도 아이들도 놀 줄을 모르고, 웃을 줄도 울 줄도 화낼 줄도 슬픈 줄도 사랑할 줄도 모른다. ‘5백 년 전 랑랑별’은 인간성의 본질을 잊고, 과학만을 맹신하며 나아갔을 때 인류가 도달할 디스토피아에 해당한다.

때때롱과 매매롱이 사는 ‘지금의 랑랑별’은 권정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고 집에서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학교에는 떠들기 시간이 따로 있고, 옷이 찢어지면 스스로 기워 입는다. 아빠는 엄마가 하는 요리를 다 할 줄 알고, 때때롱 매매롱 형제도 스스로 밥을 지어 먹을 줄 안다. 이 곳에서는 ‘뚱뚱보’가 많은 지구 별과는 달리 세 가지 반찬만 먹으며 열심히 일하고 뛰어논다. 또한 이 곳에는 새달이나 마달이는 물론이고 누렁이와 흰둥이도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보존되어 있다.

권정생 작가의 유언장.
권정생 작가의 유언장.

흥미로운 것은 그토록 과학 기술이 발전한 ‘5백 년 전의 랑랑별’을 극복한 ‘지금의 랑랑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의 우리와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는 “집안의 대장”으로 대우 받으며, 사람들은 호롱불을 켜 놓고 밥을 먹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화장실이 아닌 들판과 같은 곳에서 볼 일을 해결할 정도이다. 과거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랑랑별 때때롱’의 의미는 이 작품이 출판된 같은 해에 개정증보판이 나온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2008)에 실린 산문들과 나란히 놓고 볼 때 보다 선명해진다. 여기에 수록된 ‘태기네 암소 눈물’에서 권정생은 “우리가 옛날에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되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우리는 본래의 조선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장, 발전, 물질과는 무관하게 참된 삶을 추구한 반근대인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의 하느님’에 수록된 산문에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권정생의 절절한 육성이 직정적으로 표현돼 있다. 대표적인 것들만 정리해보아도 다음과 같다. “자연을 망가뜨리고 더럽히는 건 인간의 욕심과 낭비 때문이다.”(물 한 그릇의 양심),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결국 가난한 동족의 몫을 빼앗고 모든 자연계의 동식물의 몫을 빼앗는 행위밖에 또 무엇이 있는가?”(태기네 암소 눈물), “이 땅의 주인은 인간들만이 아닌데 인간중심의 인간제국을 건설하려는 오만이 결국 인간상실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녹색을 찾는 길), “산과 들이 깨끗하고 아름다울 때, 우리들의 모습도 아름답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울 것이다.”(쌀 한톨의 사랑), “우리는 경제성장의 뒤편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몇갑절이나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새소리가 들리던 시골 오솔길의 아이들), “사람이란 동물은 어쩔 수 없는 악마일지도 모른다.”(새야 새야), “그동안 일어난 여러 일들을 보고 과연 문명은 발전인지 퇴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골프장 건설 반대 깃발이 내려지던 날)

여기에는 인간중심주의와 생산력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모든 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다. 어쩌면 이러한 말은 수많은 사람들이 전달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 속에 담긴 정신을 실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말들이 피울음처럼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메신저가 실제로 겸손한 자연의 삶을 실천한 권정생이기 때문이다. AC(anno covid19) 원년이라는 지금, 인류는 ‘500년 전 랑랑별’로 가느냐, ‘지금의 랑랑별’로 가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권정생이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우리 모두 자연을 봅시다.”(제발 그만 죽이십시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