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br /><br />시조시인<br /><br />
김병래
시조시인

‘월사금 내지 못해 조회시간에 쫓겨 가면/ 보리밭 김매는 엄마 먼발치로 보이는/ 냇가에 숨어 앉아서 버들피리나 만들었다// 엄마 가슴 에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버들피리 불며 가는 시오리 보리밭길,/ 말갛게 뜬 낮달처럼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졸시 ‘버들피리’

이 시의 배경은 1960년대 초반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불 미만이어서 외국의 원조 없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절대빈곤의 시절이었다. 국민학교로 불리던 초등학교에도 매달 몇 십 원씩 납부금을 내야 했다. 육성회비란 말이 있기 전에는 그걸 월사금이라고도 했다.

납부금이 몇 달씩 밀리면 담임은 고육책으로 조회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성미가 고약한 교사는 매질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마도 납부금 거두는 실적이 좋지 못하면 담임이 문책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돈을 두고도 일부러 납부금을 안 내는 게 아닐진대 매질을 하고 집으로 돌려 보내봐야 당장은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다그쳐야 우선 급한 불부터 끈다고 조금이라도 더 실적을 올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닌 아이들에게는 그게 새삼스럽게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넓은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나서는 동안 쫓겨난 아이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텅 빈 집 부엌에서 냉수나 한 사발 들이켜고 잠시 멍하니 앉았다가 되짚어 학교로 가는 게 고작이었다. 쫓아내면 쫓겨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와서 곧 준다더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위의 시는 그러던 어느 봄날의 추억이다. 시냇가 버들가지에는 연둣빛 새잎이 돋고 파랗게 자란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높이 떠 종알거리는 봄날이었다. 보리밭 고랑에 웅크리고 앉아서 김을 매는 엄마가 저만치 보였지만 엄마 앞에 가서 월사금을 내지 못해 쫓겨 왔다는 소리를 할 만큼 철부지는 아니었다. 냇가에 숨어 앉아서 물오른 버들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다. 연필을 깎으려고 산에서 주운 기관총 탄띠를 펴서 만든 주머니칼이 요긴하게 쓰였다. 잘라낸 버들가지를 비틀어 껍질과 분리된 속 줄기를 빼내면 굵은 빨대 같은 껍질이 남는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한쪽 단면의 겉껍질을 조금 벗겨내면 그것이 떨판 구실을 해서 입으로 불면 소리가 난다. 불어보지 않아도 굵고 길면 낮은 소리가 나고 짧고 가늘수록 고음이 난다는 것쯤은 잘 알았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 산모롱이를 돌아와서야 버들피리를 불었다. 버들피리소리는 꼭 울음소리 같다. 버들피리를 마음껏 불어대면 속엣 것이 다 후련하게 뽑혀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시인은 이 시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서럽고도 막막한 상황에 대처하는 어린 소년의 마음이 참 의젓하고 꿋꿋하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 주거나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자연에 묻혀 살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리라. 틈만 나면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시다. 하루쯤 아이와 함께 가까운 교외로 나가서 버들피리도 만들어 불어보고 이 시도 들려주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