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탐미파 작가’ 김동리 <하>

김동리의 작품 ‘등신불’.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이다. 한국적인 특성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무녀도’ 등에서 보여준 우리 민족 고유의 무(巫)였다면, 다른 한 기둥은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문학적 형상화와 관련해서도 그가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경주는 불교 왕국이었던 신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흔히 경주를 ‘담장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일컫는데, 그 박물관을 채우는 구체적인 세목은 대부분 불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사상이 응축된 ‘한국 인간주의’의 상징이다.

이러한 ‘한국 인간주의’는

‘무녀도’에도 나타난 대칭성의 사고와도 통한다.

동시에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대칭성의 사고는 불교의 핵심에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동리의 문학은 불교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다.…

소설가 김동리의 각종 유품들.
소설가 김동리의 각종 유품들.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가본 적이 있는 불국사, 석굴암이나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곳곳에 아로새겨진 남산만 떠올려보아도 경주와 불교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불교가 경주에 남긴 무형의 정신자산도 대단한데,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수놓은 그 많은 대승고덕들의 주요 활동무대도 다름 아닌 경주이다.

김동리는 불교에서 소재나 정신을 취해온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등신불’(사상계, 1961.11)이다. 이 작품은 다솔사 소속의 광명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20대 중반 시절, 백형 범보와 만해 한용운이 나누는 소신공양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훗날 이를 토대로 완성해 낸 것이라고 한다. (김동리, ‘만해 선생과 등신불’, 나를 찾아서, 민음사, 1997)

‘등신불’의 한복판에는 주인공 ‘내’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머문,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에 안치되어 있는 등신불(等身佛)이 있다.

이 등신불은 당나라 때 소신공양(燒身供養-부처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한 스님 만적(萬寂)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물을 입힌 불상을 말한다. 만적(속명은 기·耆)은 어머니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 사신(謝信)을 찾아 나섰다가 스님이 되고, 나중에 소신공양까지 하게 된다. 만적이 몸을 태우던 날 여러 가지 신기하고 영험한 일이 일어나 새전(賽錢)이 쏟아지며, 이 돈으로 타다 남은 그의 몸에 금물을 입혀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등신불이다.

‘나’는 등신불을 보고서는 아래턱을 덜덜덜 떨면서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의 큰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이유는 등신불이 너무도 인간적인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등신불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한 여타의 불상과는 달리,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꽉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인간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등신불이 인간적인 속성만 지닌 것은 아니다. 금불각의 가부좌상은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대각보다도 그렇게 영검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자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적 특징과 신적인 특징이 혼합된 존재로 형상화된다.

‘내’가 경험하는 충격은 대부분의 종교가 신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신과 인간이 결합된 형상으로 드러난 등신불 앞에서 그토록 당황하는 것은 “습관화된 개념으로써는 도저히 부처님과 스님을 혼동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한국 인간주의’라는 독특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동리는 ‘한국문학과 한국 인간주의’(김동리 문학앨범, 웅진, 1995)에서 ‘한국 인간주의’가 근대 인간주의(르네상스 휴머니즘)를 발전시킨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중세 기독교의 신본주의(神本主義)에 대립하여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적극적인 반신적(反神的)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근대 인간주의는 무신론과 허무주의로 변모하여 급기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비극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신과 인간의 합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인간주의’를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한국 인간주의’는 신과 인간의 합작인 동시에 신과 자연의 합작이어서 ‘신을 내포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테제(정립)로서의 신본주의에 안티테제(반정립)로 일어난 근대 인간주의가 진테제(종합)로 전개된 것”이 바로 ‘한국 인간주의’라는 것이다.

 

경주시 동리목월문학관에 전시된 김동리 연보.
경주시 동리목월문학관에 전시된 김동리 연보.

이런 맥락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사상이 응축된 ‘한국 인간주의’의 상징이다. 이러한 ‘한국 인간주의’는 ‘무녀도’에도 나타난 대칭성의 사고와도 통한다. 동시에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대칭성의 사고는 불교의 핵심에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동리의 문학은 불교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다.

‘등신불’에서 만적이 등신불이 되어 가는 과정은 대칭성의 사고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적의 어머니는 ‘신과 인간’이나 ‘인간과 자연’의 융합은커녕 극단적으로 자기만을 내세우는 인물이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여의자, 아들인 만적을 데리고 사구(謝仇)라는 사람과 재혼한다. 사구에게는 신(信)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씨 집의 재산을 탐낸 만적의 어머니는 신의 밥에 독약을 감춘다. 이 일로 신은 집을 나가고, 신을 찾아 나선 만적은 결국 출가를 하게 된 것이다.

출가 이후에도 만적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만적은 자신을 거두어준 취뢰(吹<7C5F>) 스님이 열반하였을 때 그 은공을 갚기 위하여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한다. 그러나 당대의 선지식인 운봉(雲峰) 선사는 “만적의 그릇(器)됨을 보고 더 수도를 계속”하라며 소신공양을 허락하지 않는다. 운봉 선사는 만적이 5년 동안 더 수행을 하고, 우연히 문둥병이 든 사신을 만나고 돌아온 후에야 소신공양을 허락한다. 사신을 만났을 때 만적은 자신의 염주를 벗어 사신의 목에 걸어주는데, 이 행동은 만적이 자기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보살(bodhisattva)은 대칭성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이다. 순수한 증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금강반야경’에서는 “위대한 보살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이라는 세 가지 생각조차 떨쳐버리고 보시(布施)해야 한다.”라고 밝힌다.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할 때, 만적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취뢰 스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소신공양을 원할 때는 그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고, 그렇기에 운봉 선사는 만적의 깨달음을 인가(印可)하는 차원에서 소신공양을 허락한 것이다.

‘등신불’에서 ‘나’의 이야기와 만적의 이야기 사이에는 천년을 넘는 시간과 중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거리가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거리는 만적의 이야기를 마친 원혜(圓慧) 대사가 ‘나’를 향해 “자네 바른손 식지를 들어보게”라고 말함으로써 사라져버린다. ‘나’의 바른손 식지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진기수(陳奇修)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살을 물어 뗀 상처가 남아 있다. ‘나’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진기수 씨를 만났을 때, 식지 끝을 물어 뜯어 거기서 나온 피로 ‘願免殺生 歸依佛恩’(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만적처럼 자신의 온목숨을 바친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피를 흘리면서까지 뭇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또 하나의 만적’이었던 것이다.

김동리는 ‘한국 인간주의’에서 신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근대 인간주의가 극단화된 결과의 구체적 사례로 20세기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등신불’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3년이고, ‘나’가 학병으로 끌려온 청년이라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전쟁이야말로 자타의 구별이 가장 선명해지는 무대이며, 이 무대에서 인간은 신(神)은 고사하고 하나의 사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을 배경으로 했을 때, ‘신이 된 인간’ 혹은 ‘인간이 된 신’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등신불’ 이외에도 김동리는 “우주만상은 헤아리기 어렵고 인연 관계로 얽혀 있다는 화엄사상의 일면을 주제”(김동리, ‘불교와 나의 작품’, 소설문학, 1985.6)로 한 ‘까치소리’(현대문학, 1966.10)와 윤회 사상을 서사화 한 ‘눈 오는 오후’(월간중앙, 1969.4)와 ‘저승새’(한국문학, 1977.12) 등의 작품을 남겼다. 김동리의 문학에서 우리 고유의 무(巫)와 세계종교인 불교는 대칭성이라는 사고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조화롭게 어울린다.

이러한 공존은 신라 이후 계속되어 온 한국의 종교적 다양성을 해명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