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作 ‘파리 생 라자르 역’. 1877, 파리 오르세미술관.

현대미술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학자들마다 다소 이견은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19세기 중반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이러한 주장에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있다. 우선 사회적 측면에서 프랑스혁명과 시민사회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혁명과 현대미술,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혁명 이전 유럽은 기독교가 지배하던 귀족사회였다.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이 대립과 반목 혹은 손을 잡고 민중을 지배하던 계급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 미술을 소비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귀족이나 교회 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문화 향유라는 개념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이 해방시킨 것은 계급에 구속돼 있던 민중들만이 아니었다. 미술도 함께 해방이 됐다. 오랫동안 미술은 귀족들의 화려한 대저택 벽면을 장식했다. 화가들은 무슨 내용의 그림을 그렸을까? 겉으로나마 귀족들이 숭상하던 도덕적이고 고상한 가치를 신화의 위대한 인물들에 투영한 그림들이 그려졌다.

혁명 이후 여전히 고전적 내용을 담은 그림들은 그려졌지만 예전엔 존재하지 않던 종류의 그림들이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고전미술에서 벗은 몸으로 그림 속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신들뿐이었다. 그런데 몇몇 화가들이 이런 금기를 깨트려 버린다. 거리를 오가며 보았을 법한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그림으로 그려졌을 때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여신들조차도 나체로 등장할 때는 부끄러워 그런지 살짝 시선을 피하고 있건만, 이 현실의 여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감상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에두아 마네의 ‘올랭피아’ (1863)를 떠올리면 된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1863년 파리에서 전시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면,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같은 해 살롱전에 출품돼 전시되자마자 나폴레옹3세가 구입해 갔다. 그 시대 사람들의 취향에 적합했던 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카바넬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가 그 유명했던 화가 카바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가? 반면 우리 중 누가 그렇게 형편없는 그림을 그린 마네를 기억하지 못할까? 이것이 바로 미술사의 역설이다.

미술이 사회적 통념과 미술은 이래야한다는 고정된 가치로부터 해방되면서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위한 주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미술의 중심이자 현대미술이 꽃피운 파리에서 화가들이 유독 자주 화폭에 담았던 주제가 있다. 바로 파리의 거리 풍경이다. 이 또한 시민사회의 태동과 근대적 도시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현대미술이 태동했던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1853년에서 1870년까지 진행된 이른바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개발’(Haussmann’s renovation of Paris)이 지금의 낭만적인 도시 파리를 탄생시켰다. 그 이전의 파리는 좁은 도로에 땅은 질퍽이고 곳곳에서 악취가 풍기는 인구가 밀집된 비위생적인 도시였다. 오스만 남작은 넓은 신작로를 닦았고 도시 곳곳에 시민들이 쉴 수 있는 공원을 조성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을 하며 전에 없던 사회 현상이 관찰된다.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새로운 교통수단이 시간관념을 바꿔 놓았고 삶의 속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도시와 도시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보다 미술가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이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넓게 뻗은 길 위에 펼쳐진 도시풍경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미술가들은 매일 같이 이러한 사회적 변화들을 직접 경험했고 이를 작품으로 담았다. 미술사는 현대미술이 시작된 1850년 무렵의 이 새로운 미술에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술사학자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