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탐미파 작가’ 김동리 <상>

김동리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인 ‘무녀도’.
김동리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인 ‘무녀도’.

김동리(1913-1995)의 묘비에는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거인 김동리와 평생을 교유하며 한국문학을 이끌었던 또 한 명의 거인 미당 서정주(1915-2000)이다. 함께 한 시간의 깊이와 최고 시인의 안목이 만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이 묘비명만큼 김동리라는 인간과 문학을 요령 있게 압축해 놓은 글도 드물다.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고 불린다.

이것은 작가가 “우리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것,

혹은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무속과 나의 문학’, 월간문학, 1978.8)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러한 필생의 과업을 수행하기에 김동리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신라 천년 고도(古都)인 경주에서

나고 자랐던 것이다.…

김동리 문학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경주시 진현동 동리목월문학관.
김동리 문학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경주시 진현동 동리목월문학관.

한국문학사에서 김동리는 많은 힘을 누렸던 문인이었다. 좌익의 내로라하는 맹장들에 맞서 순수문학을 옹호했던 김동리는 40대에 이미 한국문단의 원로였다. 1953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에 부임했고, 1954년에 41세의 나이로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예지 ‘현대문학’,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는 문단 조직, 후배 문인 양성, 발표 지면이라는 문학장의 핵심적인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단권력자로서의 모습은 김동리의 당당한 실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를 넘나들며 신춘문예를 세 번이나 통과한 재사이다. 더군다나 그의 뒤에는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이름이 높았던 맏형 김정설(1897∼1966)이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힘의 근원에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비약하던 그의 작품이 존재했다.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고 불린다. 이것은 작가가 “우리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것, 혹은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무속과 나의 문학’, 월간문학, 1978.8)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러한 필생의 과업을 수행하기에 김동리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신라 천년 고도(古都)인 경주에서 나고 자랐던 것이다. 경주는 화랑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가장 많이 남겨져 있는 곳이다. 김동리는 자신의 정신은 물론이고 육신에까지 경주의 고유한 정신과 풍속을 깊이 새기며 성장하였다.

‘巫女圖(무녀도)’(중앙, 1936.5)는 경주라는 신성한 자궁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요한 배경인 성건동은 일명 ‘무당촌’이라고 불릴 만큼 무당이 한 집 건너에 있는 무속 짙은 마을이었다. 김동리는 경주시 성건동 189번지(현재는 284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도 골목에 무당집이 많았다고 한다. 주인공 모화가 마지막에 굿을 하다 빠져 죽은 소는 예기소이다. 서천 변 금장대 절벽 밑에 있는 예기소는, 예기(기생)가 사람을 유혹하듯이 물이 사람을 유인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김정숙, ‘김동리 삶과 문학’, 집문당, 1996, 68-75면) 욱이가 처음 집을 떠나 머물렀다고 하는 기림사는 일제 시대 경주 지역의 14개 사찰을 관할하던 대사찰이었다.

‘무녀도’는 작가의 출세작일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무척이나 아낀 작품이다. 이것은 ‘무녀도’가 장편 ‘을화’(1978)로 개작될 것까지 포함하여 무려 세 번이나 개작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녀도’는 무당인 모화와 기독교인인 아들 욱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신동으로 소문난 욱이는 공부를 하기 위해 아홉 살에 모화의 품을 떠났다가 약 10년 만에 ‘신약성서’를 들고 돌아온다. 이때부터 모화는 욱이를 “몹쓸 잡귀에 들린 것”으로 여기고, 욱이는 모화를 “사귀 들린 여인”으로 여기며 서로 갈등한다. 그 갈등은 점차 고조되다가 결국 모화가 욱이를 칼로 찌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모화와 욱이의 갈등에는 김동리의 유년기 체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는 자수성가한 당당한 인물이었는데 5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그만 술로 인생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유교적 가풍에 젖은 아버지는 아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아 둘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술을 가리켜 “마귀의 음식”이라고 하고, 술에 취한 아버지는 “예수 잡자, 너구리 잡자”라며 미친 듯 어머니에게 달려드는 일이 매일같이 펼쳐졌으니, 어린 김동리가 받았을 충격과 공포는 대단했을 것이다.(김윤식, ‘김동리와 그의 시대’, 민음사, 1995, 103-105면) 이러한 부모의 싸움은 어린 김동리의 내면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것이 ‘무녀도’에서 모화와 욱이의 종교적 갈등이라는 명작을 낳았다는 것이다.

김동리에게는 이때의 어머니가 모화이자 욱이이고, 또한 아버지가 모화이자 욱이였을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자와 배척하는 자라는 면에서 욱이는 어머니이고 모화는 아버지일테지만, 자신의 신앙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욱이가 아버지이고 모화는 어머니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핵심은 어린 김동리에게 무서움, 전율, 절망, 비분, 저주스러움을 전해준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처절한 싸움의 원체험이 ‘무녀도’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결국 욱이는 죽지만, 그의 노력으로 이 미개하고 낙후된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당이 서고 전도사가 들어온다. 대신 모화는 기독교를 믿게 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다. 이 상황에서 모화는 일생일대의 시험에 나선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기소에 몸을 던진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 굿을 함으로써, 자신의 영검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화는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데 실패하고, 대신 예기소 검푸른 물속으로 스스로 들어간다.

모화와 욱이의 대결은 끝내 둘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둘의 승부는 욱이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도 있다. 욱이는 역사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러했듯이, 죽음을 통해 그토록 자신이 꿈꾸던 복음의 전파라는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둘의 대결에서 패배자는 모화이고, 모화의 죽음은 소멸해 가는 세계에 대한 비극성을 보여준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과연 모화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에 맞서 무력하게 패배한 비극의 주인공이기만 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작가 스스로 ‘무녀도’에 대해 말한 ‘신세대의 정신’(문장, 1940.2)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동리는 ‘무녀도’의 모화가 보여준 무(巫)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이념적 세계인 신선(神仙)관념의 발로이며, 신선의 이념은 “한(限) 있는 인간이 한(限)없는 자연에 융화(融和)”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동리는 민족의 고유한 정신인 신선 관념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세계적인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1908-2009)가 말한 대칭성의 사고와도 상통한다. 대칭성의 사고에서에는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직감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이와 관련해 모화의 특징으로 만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화가 소통하고 교감하는 대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돼지, 고양이, 개구리, 지렁이, 고기, 나비, 감나무, 살구나무, 부지깽이, 항아리, 섬돌, 짚신, 대추나뭇가지, 제비, 구름, 바람, 불, 밥, 연, 바가지, 다래끼, 솥, 숟가락, 호롱불…”이 해당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와 서로 보고, 부르고 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성내고 할 수 있는 이웃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화는 그 모든 것을 “님”이라 부른다.

모화가 검푸른 예기소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춤과 물의 너울은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고 표현된다. 어쩌면 모화는 단순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라는 대자연과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고유의 신선이 된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죽음을 통해 만신(萬神)에서 신(神)이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물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기며, 그것과 융화되기를 갈망하는 정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미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지금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서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에볼라, 사스, 메르스에 이어지는 인수공통 감염병으로 살 곳을 잃은 야생동물이 인간과 접촉하면서 탄생한 재앙이라고 말한다. 인간만을 절대시하고 자연을 한갓 수단으로 여긴 결과, 자연의 보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정신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제2, 제3의 코로나19는 언제든지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구리, 살구나무, 부지깽이마저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겨 ‘님’이라 부르는 모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얼굴인지도 모른다.

 

작가 김동리는…

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전통의 세계, 종교의 세계, 민속의 세계에 천착해 이를 바탕으로 빼어난 작품을 써낸 소설가”로 평가하고 있다. 대구 계성학교와 서울 경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엔 중앙일보, 이듬해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대표적인 우파 진영의 작가.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무녀도’ ‘등신불’ ‘황토기’ ‘사반의 십자가’ 등을 썼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