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양산인’ 장지연의 소설은…

상주시 서성동에 세워진 위암 장지연 기념비.

장지연(1864-1920)은 한말의 유학자요 역사가이자 또한 언론인이며 문필가이고 애국독립사상가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발표한 명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민족의 울분과 기개를 온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구한말을 대표하는 우국지사인 장지연은 경북 상주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으로 경북 상주군 동곽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깊이 있게 배우며 성장하였다.

 

장지연은 이 작품을 읽은 여성들이

 

적극적인 애국활동에

나서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다.

‘애국부인전’이 여타의

역사전기소설과는 달리

순한글체로 발표된 것도

당시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을

주독자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다룬 서적.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다룬 서적.

황성신문, 시사총보, 해조신문, 경남일보 등의 언론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대한자강회’, ‘국채보상운동’의 사회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지연의 모습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한때 소설을 창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는 단 한번 소설을 창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숭양산인(嵩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부인전’(광학서포, 1907)이다. 이 때의 애국부인은 백년전쟁(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에서 활동한 프랑스의 잔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이다.

흔히 개화기라고 불리는 19세기 후반부터 한일한방에까지 이르는 시기는 우리 민족에게 큰 위기이자 작은 기회의 시대였다. 이 시기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과제는 여러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과 전근대의 미몽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현실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이 이러한 시대정신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에 민감하게 반응한 소설로,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등이 창작자였던 신소설과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이 창작자였던 역사전기소설을 들 수 있다. 신소설은 주로 반봉건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신소설을 대표하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서 부모를 잃은 일곱 살의 옥련은 문명개화라는 절대적 이념을 따라 평양에서 출발해 오사카를 거쳐 워싱턴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달려 나간다. 그 절대의 이념 앞에 조선이나 민족을 위한 자리는 놓여 있지 않다. 이에 반해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으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애국지사들이 창작한 역사전기소설은 주로 반제 독립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로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서사건국지’(1907), ‘이태리건국삼걸전’(1907), ‘애국부인전’(1907), ‘을지문덕’(1908), ‘이순신’(1908)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민족적 위기를 극복한 영웅들이다. 신채호가 ‘을지문덕’ 서문에서 “과거의 영웅을 그려 미래의 영웅을 불러온다.”는 영웅대망론을 제시한 것처럼, 역사전기소설은 과거의 영웅들을 통해 외세의 위협 앞에 놓인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은 잔다르크가 17세의 나이에 참여한 오를레앙 전투(1429)부터 영국에 의해 화형을 당할 때(1431)까지를 다루고 있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이 상호 작용하는 끊임없는 대화”(E.H.Carr)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란 그 시대정신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진다. 과거는 불변이며 미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역시도 현재의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애국부인전’의 잔다르크도 시공의 머나먼 거리를 뛰어 넘어 장지연의 관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잔 다르크이다.

소녀의 몸으로 나라를 구하고 결국에는 화형까지 당한 잔 다르크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드물다. 그 결과 잔다르크는 참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며 다양한 얼굴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였다. 잔다르크를 대상으로 한 문학작품은 잔 다르크가 처형당한 직후부터 창작되었으며, 지금까지 그녀는 성녀, 신비주의자, 전사, 예언자 등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에서 잔다르크를 “파렴치한 마법사요 마녀”로 그리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는 “형편없는 시골 처녀에다 불쌍한 정신착란자”로 규정하였다. (헤르베르트 네네, ‘잔다르크’, 이은희 옮김, 한길사, 1998, 174-179면) 장지연이 ‘애국부인전’을 통해 재현한 잔다르크는 성녀도 마녀도 아닌 ‘국민의 역할을 다하는 애국자’이다.

잔다르크가 활동한 시기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기 수백년 전인 중세의 한복판이며, 잔다르크가 목숨을 내걸고 활동한 것은 자기가 속한 고향과 왕세자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국부인전’에 나타난 잔다르크의 모습은 민족지사이자 애국지사였던 장지연의 관점이 개입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잔다르크가 전투적 국가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1870년 이후이며,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모리스 바레스와 레옹 블루아는 증오심에 찬 자기들의 국수주의를 위해 잔 다르크의 이름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헤르베르트 네네, 앞의 책, 189면) ‘애국부인전’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로는 국가, 국민, 애국 등을 들 수 있다. 잔다르크는 출정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제 몸은 비록 여자이오나 어찌 법국의 백성이 아니리까. 국민된 책임을 다하여야 비로소 국민이라 이를지니”라고 말하고, 프랑스 장군 포다리고와의 대화에서 “우리 국민된 의무를 극진히 하여 법국 인민됨이 부끄럽지 않게 할 따름이요”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국민의 의리”, “국민된 자의 염치”, “법국의 동포 국민된 유지하신 제군들”, “국민된 한 분자의 의무”, “국민의 책임”, “국민을 위함” 등의 말이 계속 해서 등장한다.

장지연의 민족주의적 문제의식은 매 회의 마지막에 작가가 덧붙인 논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회에서는 우리 민족을 외세의 침략에서 구원한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의 행적을 언급하며, “법국은 이때에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 같은 충의 영웅이 뉘 있는고.”라는 논평을 마지막에 제시한다. 이것은 ‘애국부인전’의 잔다르크가 앞에서 언급한 영웅들과 같은 민족영웅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잔다르크에 투영된 장지연의 강렬한 민족의식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애국부인전’을 불허가출판물로 지정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개화기 역사전기소설에 호출된 영웅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은 프랑스혁명 당시 활약한 롤랑부인(Madame Roland, 1754-1793)의 일대기를 그린 ‘라란부인전’(1907)과 더불어 드물게 여성인물을 다룬 역사전기소설이다. ‘애국부인전’은 여성을 비하하고 국가 사업에서 소외시키는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가득하다. “어찌 남자만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고 여자는 능히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지 못할까. 하늘이 남녀를 내시매 이목구비와 사지백태는 다 일반이니 남녀가 평등이어늘 어찌 이같이 등분이 다를진대 여자는 무엇하려 내시리오.”라는 잔 다르크의 비판이나, “슬프다. 우리나라도 약안 같은 영웅호걸과 애국충의의 여자가 혹 있는가.”라는 작가의 논평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장지연은 이 작품을 읽은 여성들이 적극적인 애국활동에 나서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다. ‘애국부인전’이 여타의 역사전기소설과는 달리 순한글체로 발표된 것도 당시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을 주독자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장지연은 여성들의 계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애국부인전’을 발표한 다음 해에 출간한 ‘여자독본’(1908)은 일종의 열전(列傳)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동서양의 여성들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또한 장지연이 관여한 ‘가정잡지(家庭雜誌)’도 여성을 계몽하려는 의도의 여성잡지였다. ‘애국부인전’, ‘여자독본’, ‘가정잡지’는 모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여성교육”(배정상, 위암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연구, 현대문학의 연구 30집, 2006, 79면)을 위해 기획되었던 것이다. 유학을 기본적인 교양으로 익힌 장지연이 여성의 계몽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애국부인전’을 공적 담론에서 소외된 부녀자만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한정짓는 것은, 이 작품의 담론효과를 좁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동시에 남성들에게도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의 딸로 태어난 17세의 어린 여성이 나라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조선 여성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었을 테지만, 동시에 어린 여성보다는 나은 지위에 있는 가부장제의 남성들에게도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지연이 이러한 효과를 다분히 의도한 대목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잔다르크의 충성심에 감복한 아버지가 “너는 여자로서 애국하는 의리를 알거든 남자된 자야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라고 한탄하거나, 잔 다르크의 연설을 들은 남성들이 “원수는 일개 연약한 여자로서 저러한 애국열심이 있거늘 우리들은 남자가 되어 대장부라 하면서 도리어 여자만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라고 스스로를 꾸짖는 대목 등이 그러하다.

장지연이 그토록 원하던 조선의 잔다르크는 과연 얼마나 탄생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변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어두운 식민지의 하늘을 환하게 밝힌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만 수백 명에 이른다. 이 위대한 여성들을 잊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을 제대로 읽는 독법인지도 모른다.
 

위암 장지연은…

186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필력 좋았던 언론인이자 계몽운동가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기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각 지역에 발송했다. 1905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린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발표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 교육 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만들었고, 경남일보사 주필 등으로 일했다. ‘유교연원’ ‘대한신지지’ 등의 책을 썼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