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벅찬 일출과 박두진 시인

무섭도록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 이처럼 환한 빛이 ‘코로나19’를 태워버리길 기다린다.

저무는 태양이 소멸과 우울함이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면, 솟아오는 붉은 해가 연출하는 일출은 희망과 새로움의 은유다.

그래서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오면 바닷가로 몰려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꿈과 소망이 이뤄지기를 빌곤 한다.

2020년이 시작된 지 70일 넘었지만 올해는 ‘희망’과 ‘다시 시작함’의 메타포인 일출이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기자만이 아닌 적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코로나19로 인한 비극적 사태’가 아직 안정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의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는 차츰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다른 지역에서 또 다른 ‘코로나19 폭탄’이 터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번 주 중반엔 서울의 한 건물에서 90명 이상의 새로운 감염자가 나타났고, 다른 도시에서도 특정한 몇몇 공간에서 수십 명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확인되기도 했다.

국가를 가리지 않고 창궐하는 바이러스의 위험성은 가까운 중국과 일본도 여전하고, 이로 인해 활발했던 두 나라와의 경제·문화적 교류도 자의 반 타의 반 거의 끊어진 상태다.

항공업계와 여행업계는 직격탄을 맞아 휘청댄다. 상당수의 항공·여행업 종사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임금 삭감과 순환 근무, 장단기 휴직과 실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던 하늘길이 한 순간에 막혀버린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도 비상 상황에 들어섰고, 이란에선 정부 고위층 인사 여러 명이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사망한 이들도 적지 않다는 외신 보도가 들려온다. 이란은 장기간의 경제 제재와 봉쇄 탓에 진단 장비와 약품이 부족하니 앞으로가 더 문제다.

설상가상 미국의 감염자 증가 속도 또한 가파르다. 최근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최고위층 지도부가 한국인 입국 금지를 심각하게 논의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미국으로 오가는 길도 폐쇄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따스한 햇살이 ‘코로나19’를 태우는 상상을 하며…

인간은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동물이다. 붉은 보석처럼 환하고 아름답게 밝아오는 일출의 아침을 보면서 소원을 말할 때도 가장 먼저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들을 떠올린다.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다른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대학 입학 시험과 승진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원합니다’ 등등.

개개의 인간이 지닌 희망과 소망의 범위는 지극히 협소하다. 그게 넓어진다 한들 겨우 가족 등의 아주 가까운 피붙이나 소수의 친구를 위한 것들에서 멈추기 십상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탓하랴. 너나없이 우리 대부분은 일상을 허위허위 살아가는 겁 많은 소시민일 뿐인데.

9년 전쯤 이란을 여행했을 때다. 해변과 호숫가, 강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 경험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고대 도시 야즈드(Yazd)에서 처음으로 본 사막에서의 일출은 생경했고, 그랬기에 더 장엄했다. 야즈드는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던 곳. 이른바 수난과 고통을 어느 지역보다 많이 겪은 곳이다.

그날이다. 어둡던 모래밭에 눈부신 햇살을 무한정 뿌리며 이글거리는 사막의 태양을 함께 맞이하던 독일 청년과 이란 성직자에게 농담처럼 물었다.

“한국에선 사람들이 해를 보며 소원을 빌어. 이처럼 아름다운 일출을 봤으니 너희들도 소원 하나쯤 말해보지 그래.” 연이어 돌아온 두 사람의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이란의 성직자는 “우리 아이들이 차별과 폭력 없는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독일에서 온 20대 초반 젊은이는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사라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들려줬던 것.

만약 그날 기자가 박두진(1916~1998)의 시집(詩集)을 들고 있었더라면 ‘해’라는 박 시인 최고의 절창을 낭송해줬을 게 분명하다.

절망을 떨치고 희망으로 걸어가는 흥겹고도 단호한 행진곡 같은 시, 어떤 지독한 바이러스도 단번에 활활 태워버릴 에너지로 넘치는 시 말이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피어난 봄꽃. ‘희망이 있다면 삶은 지속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피어난 봄꽃. ‘희망이 있다면 삶은 지속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꽃과 함께 나른한 봄을 즐길 시간이 올해도 오겠지

‘만 사람의 손가락질은 심장으로 날아오는 독화살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저주가 그 저주받는 대상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걸 뒤집어 해석하면 ‘만 사람의 간절한 기원은 어떤 극악한 저주도 풀 수 있다’는 게 아닐지.

거창한 소원이 아니면 어떠랴. 지금은 한국인 모두의 희망 섞인 소망이 하나로 모여도 좋을 시기다.

그게 어느 바닷가이건 무슨 상관일까. 또한 거기에 몇 명이 모였다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그저 다들 똑같은 심정으로 이런 소망을 빌어보면 어떨까.

“저 뜨거운 햇살에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바이러스가 녹아내리기를 바란다. 바로 그 자리에 분홍빛 진달래는 필 것이고, 우리는 지난해처럼 빛나는 꿈을 노래할 것이다.”

이번 주말엔 마스크를 벗고 가까운 산길에서 깔깔대며 기자와 이웃들을 반길 봄꽃과 반갑게 악수하고 싶다. 아래는 ‘돗돔’을 희망으로 은유한 졸시다.

돗돔을 기다리며

수영하는 아이를 삼킨다는 거대한 은빛비늘/소문은 끈질기게 떠돌았다/누군가는 아름드리 참나무를 꺾어/해지는 방파제 끝에서 오랫동안 서성이고

새까만 낯짝의 사내들이/닻을 올리고 먼 바다로 떠날 무렵/선착장마다 만삭의 아내들이 흐느꼈다/길잡이굿의 징소리로도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

먼저 떠난 작은 섬의 노인은 낡은 액자 속에서/아직도 귀때기 파란 스무 살인데/부랴부랴 굵은 낚시를 건사하는/남편의 손놀림은 아내를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주춤대던 아이의 울먹거림은 기어코 울음이 되고

허나, 공포와 마주 서지 않는 삶이란 여기 없으니/기어코 떨쳐야할 두려움 너머로/보라, 저기 울컥대는 파도 위 날랜 달음질로/돗돔이 돌아온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 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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