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매섭게 불어오는 러시아의 눈보라

상하이에서 출발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여행 중인 중국 라이더들과 만났다.
상하이에서 출발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여행 중인 중국 라이더들과 만났다.

◇ 옴스크 가는 길, 중국 라이더들과 만나다

옴스크에서 드디어 현묵 군을 만났다. 대구가 고향인 현묵 군은 같은 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고 오토바이를 열차에 실어 옴스크로 보냈었다. 러시아를 벗어날 때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옷을 얼마나 껴입었는지 헤아려보니 상의만 여섯 벌이다. 티셔츠, 조끼, 슈트 내피, 슈트, 비옷, 형광조끼. 그렇게 입고도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었다. 비가 눈보라로 변하더니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옷에 붙은 눈이 바로 얼어붙을 정도였다. 시베리아 날씨는 정말 종잡을 수 없다. 5월 말에 난데없는 눈보라라니.

도저히 그대로 달릴 수 없어 간이 버스 정류소에서 멈췄다. 현묵 군과 다시 옴스크로 돌아갈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찰나 10대가 넘는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아직, 여행의 초반…
물건들은 하나씩 고장나고
옷은 해지고 부츠는 구멍나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가지만
러시아 라이더들의 호의는 늘어만 간다

라이더 10명에 지원차량 2대까지 함께 가는 횡단 여행팀이었다. 만약 그 팀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다시 되돌아갔을 수도. 나중에 그들과 카페에서 만나 식사하며 인사했다. 그들은 중국 라이더였다. 여러 기업에서 후원을 받은 듯했다. 미캐닉이 동행하고 고장난 오토바이를 실을 수 있는 밴과 쉴 수 있는 캠핑카까지 갖춘 대형 프로젝트 팀이었다.

이런 날씨에 아무 곳에서나 편히 쉴 수 있는 캠핑카까지 뒤따른다면 딱히 힘들 것도 없겠다 싶어 부러웠다. 그들은 상하이에서 출발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중이었다.
 

우랄산맥을 넘다 일본인 여행자 다이스케 군을 만났다. 그는 매일 자신의 여정을 기록 중이었다.
우랄산맥을 넘다 일본인 여행자 다이스케 군을 만났다. 그는 매일 자신의 여정을 기록 중이었다.

우리도 북한과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들처럼 배를 타지 않고서 바로 국경을 통과해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런 날이 올지. 한 중국 라이더가 유명한 한국인 라이더를 안다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김선호 씨(2018 BMW GS 트로피 한국 대표선수)와 친구였다. 그가 전화 연결을 해준 덕분에 김선호 씨와 통화까지 할 수 있었다.

투먼에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했지만 숙소를 잡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저렴한 러시아 숙소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출입문(?)을 가졌다. 카메라나 직접 방문자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준다. 두 번째 방문했던 곳은 분명 안에서 소리가 났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마 우리 꼴을 보고 수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행색은 거지 중에 상거지에 가까우니….

러시아에 도착하고서 내내 비를 맞고 다닌데다 외투는 한 번도 빨아 입지도 못했다. 종일 흙탕물을 맞고 다닌 터라 날이 저물 때쯤에는 꼴이 더 사나울 수밖에. 그래도 투먼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덕에 깨끗한 숙소를 구해 들어왔다. P군이 탁월한 선택을 했다. 지금까지 묵었던 곳 중에 최고였다. 오토바이도 안전하게 둘 수 있는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무래도 추위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러시아 마트의 보드카 매대. 다양한 술을 갖추고 있다.
러시아 마트의 보드카 매대. 다양한 술을 갖추고 있다.

◇ 하나씩 고장나는 물건들, 괜찮을까

이제 예카테린부르크로 간다. 이렇게 화창할 수가. 달리기 완벽한 날이었다. 저렴하고 훌륭한 숙소에서 충분히 휴식도 취했고, 오랜만에 장도 봐서 영양 보충도 했다. 소시지에 라면에 요구르트에 치즈에 빵에 과자에... 꽤 많이 샀는데도 900루블(1만5천 원). 보드카 매대 앞에서 한참 구경했다. 어느 마트에 가더라도 주류 매대가 잘 갖춰져 있다. 우리네 같으면 큰 마트에 가야만 볼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이 술을 가까이한다는 증거겠지.

러시아의 체감 물가는 한국의 절반 정도다. 물론 모스크바 같은 큰 도시의 물가는 만만치 않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생활할 수 있다. 옥탄가 95인 고급 휘발유 값도 45루블(850원) 정도다.

러시아 사람들의 벌이를 생각하면 이 물가가 적당한 것인지 나로선 짐작할 수 없다. 일반 러시아 국민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본다면 저렴한 물가인지는 모르겠다.

물건들이 하나씩 고장 나고 있다.

작동불능인 에어펌프는 이미 버렸고, 시계는 5월 14일 오후 6시에 멈춰버렸다. 오기 전에 배터리를 갈고 왔는데, 이럴 수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 가서 쿠델카의 손목시계 사진을 오마주 할 계획이었다. 멈춘 시계 그대로 찍는 것도 재밌을 듯하나 왜 벌써 고장 났는지. 바짓가랑이도 해졌다. 중고 슈트를 구입했으나 그동안 별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에야 하필 가랑이가 찢어지다니.

숙소 주인 아주머니께 실과 바늘을 빌려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현묵 씨가 가방에서 꺼내주었다. 여동생이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 했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안쪽으로 수선을 해야 깔끔한데 내피를 뜯어내야 해서 그냥 바깥쪽으로 임시로 꿰맸다. 면실이라 오래 버티지 못할 듯하고 나일론실을 구해 다시 꿰매는 수밖에. 계속 비에 젖었다 말랐다 반복한 부츠는 뒤꿈치 접합 부분이 점점 벌어져 비가 내릴 때는 어김없이 물이 스며들었다. 아직 여행의 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 문제들이 계속 연쇄 반응처럼 일어날 줄이야.

시베리아를 지나는 동안 몸도 물건도 만신창이가 되고 있지만 러시아 라이더들의 호의는 계속 이어졌다.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도중 잠시 쉬며 체인에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길을 가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멈춰 도와주려는 라이더가 그 시간동안 두 팀이나 있었다.

 

우랄산맥의 차량 정체 구간. 누구도 경적을 울리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오른쪽 라이더가 현묵 군.
우랄산맥의 차량 정체 구간. 누구도 경적을 울리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오른쪽 라이더가 현묵 군.

◇ 우랄 산맥을 넘어 유럽에 가까워지다

드디어 우랄산맥을 넘었다. 집을 떠난 지 18일째.

이제 지리적으론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으로 넘어온 셈. 바이칼을 끼고 이르쿠츠크로 가는 숲길이 최고라고 했었는데 첼랴빈스크에서 우랄산맥을 넘어 우파 가는 길이 더 아름다웠다.

규모에서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이쿠츠크 가는 길이 라이트급이라면 우랄산맥 넘는 길은 울트라 헤비급이라고 해야겠다.

달리는데 정신이 팔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눈과 마음으로 담았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산맥을 넘다 자전거로 여행 중인 다이스케 군을 만났다. 알래스카에서 시작해 계속 여행 중이다. 그는 볕에 까맣게 그을린 선한 얼굴을 가졌다. 그의 여행일기장에 나의 이름을 남겼다.

매일매일 꼼꼼하게 자신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쓰는 사람을 보면 반갑다. 언젠가 다시 만나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무엇을 찾아 여행 중인 걸까.

우파에 가까워서 한참 길 위에서 멈춰있었다. 1시간 넘게 정체되어 있었는데 느긋하게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운전자들이 많았다. 그러고보니 경적을 울리는 운전자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현묵 군이나 나나 러시아 운전자들의 오토바이에 대한 배려가 우리보다 훨씬 낫다는데 달리면서도 계속 공감했다.
 

방수 부츠는 뒤꿈치 접합 부분이 벌어져 비가 올 때마다 부츠 안에 물이 고였다.
방수 부츠는 뒤꿈치 접합 부분이 벌어져 비가 올 때마다 부츠 안에 물이 고였다.

울란우데에 있는 ‘젊은 스쿠터’ 팀은 오토바이가 계속 말썽인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기차에 실어 모스크바로 보내고 팀원들 모두 버스로 몽골로 갔다 다시 모스크바로 향한다고.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기면 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없다. 우파에 들어와서도 결국 젖을 만큼 비를 맞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숙소에 도착하고서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맑은 날이 별로 없다. 꼭 장마철 날씨 같다.

어제 가랑이 터진 바지를 겨우 꿰맸는데 오늘은 왼쪽 겨드랑이가 터졌다. 근육을 키우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옷이 해지는지 모르겠다. 나중에는 기운 자국으로 덕지덕지할 듯. 입을만한 라이딩 기어는 워낙 비싸니 돌아갈 때까지 어떻게든 바느질로 버티는 수밖에. 문제없이 달린다면 3일 후면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이제 시베리아도 거의 건너온 셈이다.    /조경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