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인 이산하

경북 시골에서의 유년을 여전히 기억하는 이산하 시인.
경북 시골에서의 유년을 여전히 기억하는 이산하 시인.

반세기 전 들었던 포항 옥계계곡의 물소리를 여전히 기억하는 시인이 있다. 10대 중반 고향을 떠난 그는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생활하며 영민한 문사(文士)이자 가슴 뜨거운 사회운동가로 성장했다.

제주 4·3항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집 ‘한라산’, 빼어난 성장소설 ‘양철북’, 미려한 문장으로 축조한 사찰기행문 ‘피었으므로 진다’ 등을 출간한 이산하(60). 그는 작가인 동시에 민주·인권 관련 시민단체에서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얼마 전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유럽의 강제수용소로 취재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입은 상처들이 내 핏줄처럼 보여 하나하나 쓰다듬어주고 싶다”고 말하는 이산하를 만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에겐 ‘시인의 어법’이 있으니 가급적 답변은 그의 말투를 그대로 옮긴다.
 

포항 죽장면서 유년시절 보낸후 도시行
외로움 달래던 도서관서 탐닉한 도서들
시대를 노래한 음유시인으로 이끌어 줘
고교 시절 ‘한국 고교 문단’ 양분하던
안도현 시인과 깊은 인연 이어오기도
억압의 시절, 사회 변혁운동에 투신 후
꾸준히 ‘지식인의 사회참여’ 실천해 와

-경상북도 영일(현 포항 북구)에서 태어났다. 유년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전국 오지기행’이란 책에 소개될 만큼 깊은 산골이 고향인데, 해발 930m의 내연산 옥계계곡으로 유명한 죽장면이다. 거기서 크다가 중학교 1학년 끝 무렵 눈 오는 날 이사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을 뻔했던 트라우마와 중학교 국어선생님이 칠판에 써놓고 낭독한 ‘종달새’라는 시가 떠오른다.

어릴 때 할머니가 달걀 하나를 앞에 두고 잡아보라고 했는데, 아무리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손을 뻗어도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세계, 그 삶의 비의가 내 문학적 화두가 아닐까 싶다.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나 계기는 뭔지.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가니 친구도 없고 할 수 있는 놀이와 놀이공간도 없어 우연히 도서관에 들렀다. 그런데 거기가 혼자 놀기에 너무 좋았고, 책 속엔 친구들도 너무 많았다. 매일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며 시공간을 넘어 낯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 갈 형편이 아니라 아예 도서관 서고에 틀어박혀 문학과 사상, 철학 관련 책들을 탐식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시 한 편을 써오라고 해서 ‘시 같은 것(?)’을 썼는데 그게 부산의 한 신문에 실린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뒤로도 여기저기 문학상에 응모했는데 다 당선됐다. 내 시시한 작품이 뽑힐 정도면 전국에 글 쓰는 학생들이 몇 십 명밖에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시상식장에서 교수인 심사위원이 “당선자는 대학 등록금 면제”라고 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글을 잘 쓰면 대학도 공짜로 다닐 수 있단 걸 알았다. 그때부터 사생결단으로 써서 전국 대학 문예공모전에 응모했다. 운이 좋았던지 모두 당선됐고, 원하는 대학을 골라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다.

-고교 시절엔 시인 안도현과 ‘한국 고교 문단’을 양분했다고 들었다.

△안도현은 서로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이었다. 1978년 ‘학원문학상’에도 같이 당선됐다. “안도현이 이상백(본명)과 한 판 붙자고 한다”는 이야길 여러 차례 들었는데 한 번도 ‘맞짱’을 뜬 적은 없다. 당시 소년문사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였던 경희대 고교생 현상문예는 3학년만 응모가 가능했다. 2학년이었던 안도현은 응모 자격이 없었다. 내가 3학년일 때 그 상을 받았고, 이듬해엔 안도현이 수상했다.(웃음)
 

 

모든 생명은 상처를 갖고 있고 그 상처 속에 모든 무늬가 들어 있다. 어느 상처이든 그 무늬가 내 핏줄처럼 보여 하나씩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상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역사다. 그게 나의 기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상처는 넓이가 아니라 깊이가 된다.
 

-당신이 쓴 소설 ‘양철북’을 보면 한때 ‘떠도는 승려’를 꿈꾸었던 것 같은데.

△고교 시절 외할머니가 주지스님으로 있던 경산의 암자에 들어가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어느 날 만행 중인 젊은 스님이 들렀는데, 마치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 나오는 파계승 지산스님과 비슷했다. 그 스님과 섬진강을 따라 송광사 불일암까지 흘러갔고, 거기서 법정스님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었다.

여러 절을 보고 많은 스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평생 머리를 깎을만한 ‘결정적 사건’은 없었다. 불교는 내게 돌 위로 흐르는 강물 같은 사상이었다.

-‘예민한 시인’이 학생운동과 사회 변혁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뭔가.

△어느 날 글을 쓰는데 문득 200자 원고지가 200평 토지로 보이고, 볼펜이 곡괭이로 보였다. 토지는 강의실 창문 너머 있었으니 당연히 땅을 갈아엎고 개간해서 씨를 뿌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억압당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걸 느끼지 못하던 아픈 시절이었다.

-오래 교류해온 대구·경북의 문인은 누군지.

△소설가 박덕규, 김완준 시인 안도현, 박기영, 백무산, 장정일 그리고 문학평론가로는 ‘김수영 전집’을 낸 이영준 교수 등이다. 자주는 못 보지만 그들의 문장을 통해 저물녘 긴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숨결을 느낀다.

-당신의 책 ‘피었으므로 진다’는 사찰기행문이다. 돌아본 경북의 사찰 중 인상적이었던 곳은.

△영천 은해사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많다. 대웅전과 보화루를 비롯해 조실스님 거처의 시흘방장, 백흥암의 6폭 주련, 그리고 지금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불광각의 불광(佛光) 등이 모두 추사의 작품이다. 이 글들은 추사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60대 중반에 쓴 것들이다. 획 하나마다 가파른 숨결이 녹아 있을 텐데, 그게 어떻게 녹아서 보이지 않는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걸 보러 갔다.

그 가운데 ‘불광’이란 편액에 대한 일화도 유혹이었다. 추사로부터 불(佛) 자의 한 획이 유독 아래로 길게 뻗은 글씨를 받은 주지스님이 목판에 새기다가 그 획이 너무 길다고 뚝 잘라버리고 새겼다. 얼마 후 은해사에 우연히 들른 추사가 그것을 보자 현판을 떼어내 불태워버렸다. 이 일화를 통해 난 법당의 부처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손가락 하나가 길면 잘라도 좋겠느냐”고….

앞으로 꼭 가보고 싶은 절은 오어사이고, 추천하고 싶은 절은 청도 운문사다. 새벽 예불이 장엄하다고 들었다.

-세계 2차대전 때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곳을 두루 돌아봤다. 무엇을 느꼈나.

△2년 전 ‘다크투어(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로 독일 베를린 작센하우젠, 바이마르 부헨발트, 뮌헨 다하우, 폴란드 아우슈비츠, 체코 프라하 테레진, 오스트리아 린츠 마우트하우젠 등 많은 나치의 강제수용소들을 혼자 답사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지점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어느 누구든 한계상황에 처하면 단지 1%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다.

-시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유독 ‘역사’와 ‘상처’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지.

△모든 생명은 상처를 갖고 있고 그 상처 속에 모든 무늬가 들어 있다. 어느 상처이든 그 무늬가 내 핏줄처럼 보여 하나씩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상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역사다. 그게 나의 기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상처는 넓이가 아니라 깊이가 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 말을 두어 번 반복해 읽다보면 무슨 뜻인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발표하는 작품들은 ‘이야기 시’의 형태다. 이런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 세상과 인간이 지닌 상처의 무늬를 따라가는 것이다. 부사와 형용사 같은 수사학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다. 잎이 많으면 꽃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 유골 발굴현장에 가는데 여기저기 흩어진 뼈들을 모아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하다보면 꼭 마지막에 뼈 하나씩이 부족했다. 시도 그처럼 마지막에 꼭 뼈 하나가 부족하다. 그래서 모든 시는 미완성이 아닐까.

-문학소년, 시인, 사회운동가, 여행자 등으로 살아왔다. 앞으론 어떤 삶을 살아갈 것 같은가.

△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 더 먹는 건 나도 처음이라 아주 당혹스럽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더욱 그렇다. 다만 그동안 게을러 과작이었던 시집을 몇 권 더 내는 게 작은 바람이다. 지금은 21년 만에 낼 새로운 시집을 정리하고 있다.

-젊음을 버거워하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무도 자의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자의에 의해 태어난 것처럼 너무 ‘생존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병들고 썩은 이유는 ‘좌우 이데올로기’보다도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이 앞에서는 면죄부처럼 모든 것이 용서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이 면죄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은 숨어있는 괴물이고 ‘기생충’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생존 이데올로기 너머에 뭐가 있는지 고민하는 건 청춘들의 책무 중 하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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