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터너 자화상(1799)

미술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도제식으로 이루어지던 미술교육이 국가가 설립한 미술학교로 편입되면서부터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648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세워진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를 모범으로 삼아 유럽 각 국가에서 왕립미술학교들이 생겨나는데 1744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 그 보다 조금 늦은 1768년 영국 왕립미술학교가 세워졌다. 왕들이 미술학교를 설립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국가의 정치적 이념과 권력을 찬양하는 미술가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기 위해서였다. 국가 권력이 미술교육을 주도하면서 상상력과 창작력은 정해진 규칙과 규범 내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림들은 등급에 따라 나누어졌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도 알고 있는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풍속화’ 같은 개념이다. 신화나 성서 혹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화는 가장 훌륭한 그림이고, 화가로 성공을 거두고 싶다면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역사화가 숭상되던 시대에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화가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은 한 폭의 자연을 담은 풍경화로 최고의 명성을 떨쳤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사람은 역사화와 풍경화를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분명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인데 그 안에 신화나 성서의 이야기가 눈에 띨 듯 말 듯 전개된다. 푸생과 로랭의 역사적 풍경화 전통은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로 이어졌다.

터너는 1775년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터너는 작품 활동을 했던 60여 년 동안 쉼 없이 풍경화를 탐구했고, 추상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그 당시 이미 대상성을 배제하고 빛과 색채를 실험했다. 표현이 너무나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시대 미술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너 탁월함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열네 살의 나이로 런던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스물네 살에는 벌써 왕립미술원 준회원의 자격을 얻었으며, 역대 최연소인 스물여섯에 정회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터너의 실력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화가로 경력을 쌓아가던 초창기에 터너는 수채화를 즐겨 그렸다. 수채화 또한 유화 못지않게 완결된 구성의 대규모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픽처레스크한 터너의 풍경화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미술학교를 졸업하던 스무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유화작품을 그리기 시작했고, 1802년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 것이 터너의 작품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원래부터 풍경화를 즐겨 그렸던 터너는 유럽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알프스를 방문했다. 파리의 미술관에서 푸생, 루벤스, 티치아노를 포함한 거장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풍경과 사건의 관계, 경험과 재현 그리고 색채에 대한 연구의 깊이를 더했다.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경험한 터너는 회화에 대한 또 다른 경지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림은 평평한 화면에 색을 칠한 것이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빛에 의해 드러나는 실재 세계를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빛과 색채의 연구가 거듭될수록 그림은 더욱 단순해지고 추상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그려진 터너의 그림을 두고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일평생 독신으로 지낸 터너는 자신의 정신과 열정을 오로지 그림에만 쏟았다. 1845년 왕립미술원의 원장 직에 오른 터너는 1851년 12월 죽음을 맞이해 런던 세이트 폴 대성당에 영원히 잠들었다.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술에 대한 터너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터너는 자신이 초기에 그린 두 점의 풍경화를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 두 점과 나란히 전시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미술사 최고의 거장들과 겨루고자 했던 것이다. 터너의 회화적 성취는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을 매료시켰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태동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