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사랑을 경험을 할 때엔 무슨 열병이라도 걸린 듯 가슴은 두근거리고, 속은 울렁거린다. 오직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무슨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삶은 일상적 현실 위로 둥둥 떠올라 표류한다. 이런 때에 우리는 그런 비현실적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기만을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이 바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 간에서 “사랑을 향한 굶주림”
이라는 말은, 그 허기가 채워지는 날,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있기에 아름다운 시구가 된다. 
하지만 현대과학에 대한 배고픔은 과연 채워지
는 날이 올까? “현대 과학기술, 이만하면 되었
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올까?

이제는 너무 나이 들어 그런 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심술이 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삶을 조금 더 알게 되어 하는 말이다. 도대체 그렇게 현실감을 잃은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몇 날, 몇 주, 몇 달, 몇 년 그렇게 사랑에 빠진 상태를 계속 견디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가능할 것 같지 않고, 삶은 그 사랑으로 모두 망가지게 될 것이 뻔하다.

“미국 대중은 과학기술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2003년 작고한 미국의 시사 문화 평론가인 닐 포스트만 뉴욕대학교 교수가 한 말이다. 그는 과학기술에 매혹되어 과학기술이 미국 사회에 끼치는 유의해야 할 영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미국인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했다. 그는 “과학기술은 파우스트의 거래(Faustian bargain)와 같아서 늘 주는 것이 있으면, 가져가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과학기술을 잘 사용하려면, 꼼꼼히 손익을 따져 거래를 하는 것처럼 깨어있어야 하는데 미국 대중은 과학기술에 대한 사랑에 빠져 눈멀고 귀먹어 현명한 거래를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헌데,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정도 그리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과학기술에 대한 현대인의 사랑은 강렬하다. 눈멀고 귀먹기에 충분히 달콤하다. 과학기술이 펼쳐 보이는 내일은 항상 희망으로 가득해 보인다. 하지만 그 희망은 결코 내 품 안에 잡혀 차분히 머물지 않는다. “한 발 다가서면, 두 발 도망간다.”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애정 행각엔 마지막 목적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YOLO! 한 번 사는 인생!”,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Carpe diem! 이 순간을 잡아라!”, “지금 이 순간!”, “부러우면, 지는 거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첨단 과학기술 제품 광고의 끊임 없는 권고, 예능프로그램과 드라마 속 PPL 광고,이 모든 것들의 무차별 폭격 속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의 산물들에 대한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채워지지 않은 갈망 때문에 굶주린다.

사랑에 빠진 연인 간에서 “사랑을 향한 굶주림”이라는 말은, 그 허기가 채워지는 날,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있기에 아름다운 시구가 된다. 하지만 현대과학에 대한 배고픔은 과연 채워지는 날이 올까? “현대 과학기술,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올까?

컴퓨터 메모리에서 두 배의 집적도가 가능해진 순간, 네 배로, 다시 여덟 배로의 목표가 세워지는 것은 자동적이다. 생각해보면 기술적 혁신을 이뤄 낸 연구팀을 “이제 이만하면 되었으니, 집에 가세요”라고 연구팀을 해체할 수 없는 노릇이니, 과학기술은 제동장치가 없는 기관차처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이런 현상을 보고, 프랑스의 사회비평가 자크 엘륄은 “기술은 자율적이다”라는 주장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과학기술이 어떻게 자율적인가? 하지만 과학기술 현상 자체를 볼 때, 그의 주장은 매우 호소력이 있다. 한번 발전이라는 방향을 향해 나선 과학기술은 멈추지 않고 그 발전 방향을 지속하려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과학기술이 가는 길은 과학기술자의 선택으로 “구성”되어지기 때문에, 결국 과학기술은 인간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연구할까?”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과학기술인들은 자신이 하는 과학기술에 대해 얼마나 생각할까?

“저는 연구실에서 연구만 했기 때문에 그런 건 잘 모릅니다”라는 말은 무지를 드러내는 말이지만, 종종 과학기술인들에겐 자신의 전문가로서의 삶을 은근히 부각시키려는 복심에서 하는 말일 때가 있다. 요컨대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 너무나 깊은 사랑에 빠져서, 삶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눈멀고, 귀먹었다는 말인데, 그러니 “제 삶이 부끄럽지 않아요, 저는 사랑에 빠졌거든요”라는 고백으로 들리는 대목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우리 시대에 주의해야 할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악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양심없는 쾌락, 원칙없는 정치, 윤리없는 상거래, 성품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노동없는 부, 희생없는 종교적 숭배. 이 일곱가지 죄악 중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와 과학이 분리되는 것이 커다란 오류일 수 있다는 지적으로 현대과학기술의 대세를 볼 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을 많이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돌아보면 과학기술은 한국인이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만하기도 했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쓸 때, 경제를 부흥시키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낼 때, 늘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더없이 고마운 친구였다. 지금도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위한 혁신을 통해, 또한 세계적 기술 벤처 창업을 통해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유일한 수단이 과학기술의 추구에 있다는 생각은 아마도 우리 모두의 공감대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 모든 국가적 기대감을 현실로 만들어 갈 과학기술인들은 지금보다는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으며, 누구의 수고로 내가 누리는 행복이 가능하며, 어떤 미래가 우리, 더 나아가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일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에 우리는 좀더 시간을 써야 한다. 더욱더 귀 기울여 듣고, 힘써 공부하고,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어지럽게 격변하는 이 시대에 현대 과학기술을 그래도 한자락씩이라도 이해하는 과학기술인들의 어깨엔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역사적 책임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물론 과학기술인의 손에 과학기술이 잡혀 있기에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과학기술인이 지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학기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그 결과물이 거래되는 시장이 결정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불편한 현실이다. 그렇기에 과학기술의 산물을 사고 소비하는 모든 소비자들의 의식이 더욱더 중요한 시절이 되었다.

‘인간을 생각하는 경제’라는 부제가 붙은 E. F. 슈마허의 ‘작은 것은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중요한 미덕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벌써 반세기가 훌쩍 넘은 오래된 책이지만, 슈마허가 강조한 이 중요한 절제의 미덕은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사회가 될수록 더욱 중요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닐 포스트만 뉴욕대 교수.
닐 포스트만 뉴욕대 교수.

과학기술은 마술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과학기술이 펼쳐 보이는 과학기술의 재주는 우리의 삶, 우리의 미래를 내어 맡기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과학기술에 대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그 사랑도 우리를 눈멀고 귀먹게 하도록 내어 버려 두어서는 아니된다.

과학기술이 주는 유익은 한껏 향유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유익과 함께 따라올 결과에 조금 더 눈을 돌리는 일은 성숙한 시민이 가져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와 그 안의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올 결과에 관심을 가지고 혹여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할지 모르는 이웃이 있을지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 살피는 일에 조금 더 마음을 쓰는 것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지혜롭고 성숙한 과학기술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장수영 포스텍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