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시스템의 핵심 동력은 탐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탐욕 덕분에 첨단기술 등을 개발했지만 바로 그 탐욕 때문에 도덕을 무시하기도 한다. 신이 아니고서야 사람에게는 양면의 모습이 존재한다. 즉 ‘예의바른 나쁜 인간’이다. 과일을 아무리 얇게 잘라도 그 반대 면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이중성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만 자신의 신앙과 양심 그리고 도덕정신에 따라 선과 악 중 어느 부분이 크게 될 수 있어 나머지 한쪽을 제어하게 되는 것이다. 인도 신화에 ‘아수라’ 라는 신이 있다. 어느 날 자기 여동생을 희롱하던 ‘인드라(인도신 중의 왕)’와 한판 결투를 하게 된다. 그 결투에서 인드라는 패하게 되고 도망을 간다. 아수라는 그런 인드라를 계속해서 쫓자 도망가던 인드라는 자기 발 앞에 지나가는 개미를 밟지 않으려고 잠시 멈추게 되고 그로인해 치명타를 입는다. 그러나 인드라의 임기응변으로 상황은 역전되어 결국은 아수라가 패한다. 이 사건으로 아수라는 나쁜 신이 되고, 문제의 발단을 일으킨 인드라는 쫓기는 입장임에서도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 위험을 자초한 면이 훌륭하게 받아들여진다. 아수라의 지나친 집착과 복수심은 그를 악한 신으로 만들고 흔히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진 두 얼굴의 신으로 불린다. 때문에 한쪽은 악의 얼굴로 한쪽은 선의 얼굴로 표현된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어디서나 그 이중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이중성이 진실의 잣대로 실망을 크게 안겨줄 때 상대를 영원히 아웃시켜 기억에서 지우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선행을 할 수도 있고 악행을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인간의 이중성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윤리는 이렇게 인간의 이중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이중성은 정치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난다. 겉으로는 서민을 위하는 척 하면서 부와 권력을 대물림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 한 예로 조국의 트위터가 이 이중성에 대한 가장 정리된 지식의 보고(寶庫)이다. 그의 행적과 말은 모순을 통한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검찰해체를 시발점으로 궁극적으로는 법치와 국가해체를 구현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단계적으로 천민 부르주아로 일평생 살아왔고 이 시점에는 언행의 불일치를 통해 유물론적 변증법의 중간 단계로서 공산 혁명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아나키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라는 코로나19로 몸살을 앓는다. 국가 간의 눈치 속에 미온적인 대책으로 방관하더니 전국으로 확산되자 최고대응수준인 ‘심각’으로 격상했다. 허나 이미 늦었다. 5년 전 메르스의 홍역을 앓고도 설마하다 지금과 같은 괴물로 키운 것이다. 보건, 방역의 최일선인 의료 기관부터 정부와 시민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전염병의 사태가 번지는 데 일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와중에 경험과 학습 효과가 있어서 메르스 때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다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말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 다분하다. 공동체의 안전보다는 자신이나 패거리의 이익만 앞세우는 위정자들과 우리의 이중성이 지금 코로나19를 통해 아수라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