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를 걷다가 만난 전형적 러시아풍 조형물.

중년 이상의 한국인들이 ‘러시아’라고 발음하면 연이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들이 있다. 대부분 정치적인 것들이다.

1917년 영국 망명에서 돌아와 볼셰비키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 ‘당의 무오류성’을 설파한 스탈린,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연이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보리스 옐친의 보드카 폭음, 그리고 최근 ‘21세기의 차르(제정시대의 황제)’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권력욕까지.

1980~90년대 한국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이들은 러시아 혁명 역사와 그 나라 정치 지형의 변화를 원하건, 원치 않건 듣고 보며 살았다.

비단 ‘이상적 사회주의’를 꿈꾸던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해도. 그때부터 우리에게 러시아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였다.

1990년대 초반. 밧줄에 묶인 레닌의 동상이 거리로 끌어내려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안타까워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호했다.

‘어째서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은 100년도 안 돼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인가’를 탐구하러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그것 봐라. 이데올로기는 절대로 개별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며 소련 연방의 몰락을 당연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20대 청춘들 대부분은 더 이상 ‘러시아 혁명사’를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난 시절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이름은 고차원의 방정식처럼 낯설다. 이런 세태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구세대가 지극한 정치적 관심으로 러시아를 바라봤다면, 신세대는 ‘여행지로서의 러시아’ 혹은 ‘이국적 매력의 러시아’로 관심의 초점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제 막 50대에 들어선 기자는 어떨까? 러시아에 관해서라면 구세대보다는 신세대의 감성에 가깝다는 게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겨울 러시아와 백석 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러시아 여행’과 ‘러시아 문화’가 일상이 된 시대를 살며

여행을 하다보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이 반복되다보면 사람들의 외형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나라별 특징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게 흥미롭고 신기하다.

기자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많은 수의 러시아인은 ‘근사한 하드웨어’를 갖췄다. 키는 크고, 골격은 단단하며, 팔과 다리는 시원스럽게 길다.

푸른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금발의 러시아 여성은 아시아와 유럽 어느 여행지에서도 돌올하게 눈에 띈다.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시니컬한 슬라브족 여성이 매력적이라 느끼는 건 비단 한국인들만이 아니었다.

몇 해 전 로마의 조그만 호텔에서 함께 묵은 스페인 대학생도, 프랑스 은행원도, 아르헨티나 전기기술자도 “슬라브 여자, 정말 예쁘지”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말 다녀온 러시아 극동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거기서 러시아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여권 검사와 입국 수속을 돕기 위해 ‘포항 발 블라디보스토크 행 크루즈’에 오른 러시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 중 절반쯤은 여성이었다.

검은 코트에 털모자를 쓰고 발 맞춰 걸어 다니는 그녀들에게 승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마치 일류 모델들의 패션쇼 같았다.

그 광경을 보며 곧 배에서 내려 여행하게 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던 건 비단 기자뿐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세기와 달리 21세기 한국인의 관심은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정치가 아닌 ‘러시아 여행’과 ‘러시아 문화·예술’이 됐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순간 떠오른 시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백석(1912~1996)의 사랑 노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슬라브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가진 연인과 눈 덮인 러시아와 가까운 북관(北關)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멀리 토카렙스키 등대가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멀리 토카렙스키 등대가 보인다.

▲낯선 도시에서 떠올린 젊은 날의 첫사랑

블라디보스토크는 문학청년들에겐 ‘문장강화’를 쓴 소설가 이태준(1905~?)이 네 살 꼬마였을 때 아버지를 잃은 곳으로 기억되는 도시.

새파랗게 젊었을 어머니와 함께 창밖으로 거센 눈보라 치는 차가운 방에서 부친의 시체를 바라보며 통곡했을 어린 이태준을 떠올리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일제강점기엔 이태준의 아버지 외에도 적지 않은 ‘조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저마다의 이유로 살던 곳을 떠나 간난신고의 삶을 이어가던 슬픔과 눈물의 공간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였다.

하지만 그건 이미 100년 전 이야기. 지금의 관광객들은 블라디보스토크라 하면 낭만적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점 혹은, 먹음직스런 킹크랩과 러시아식 꼬치구이 샤슬릭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중국, 북한과 인접했기에 지난 세기엔 해삼위(海參<5D34>)라고도 불렸던 그곳에서 꼬박 하루를 여행자로 지냈다.

눈 쌓인 길 위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아르바트 거리와 해양공원, 독수리 전망대와 러시아 정교회 성당, 붉은 지붕이 예쁜 토카렙스키 등대를 돌아봤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갖가지 형태의 동상들은 흩뿌리는 진눈깨비에 젖어 있었다.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걷던 곳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낭만이 거세된 중년사내의 우울 또는 서러움이었을 터.

그걸 위로해준 건 조그만 공원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꽁꽁 언 광장에서 매력적인 노래와 춤을 보여주던 그들은 인종과 국적이 다른 이방인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옆에 선 러시아 여자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때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구가 다시 마음에 새겨졌고, 흐릿하게 남아 있던 스무 살 첫사랑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잊고 살았던 청춘 시절의 고향 같아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 류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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