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조상의 산소를 찾아 인사하고 묘소 돌보는 것을 성묘라 한다. 성묘는 설날과 한식, 추석에 주로 이뤄진다. 지난 설에도 나의 성묘는 어김없이 이어졌다. 서울 모친댁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음성군 생극 공원묘지에 19년째 누워계신 선친을 찾은 것이다. 급작스레 닥친 아버지의 별세로 인해 사촌형이 서둘러 구한 묘터가 공원묘지였다. 나는 기회 닿는 대로 그곳을 찾아 선친께 소주 한 잔 권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설이나 추석 당일에는 그야말로 입추(立錐)의 여지 없을 만큼 인산인해다. 고속도로가 막히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여서 당일을 피해 이튿날에 묘소를 찾는다. 온화하기가 4월 중순 같은 1월 26일 정오 무렵 산소에 당도한다. 차를 세워두고 비탈진 언덕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등에 실린 소주병이 듬직하다. 언제부터인지 선친묘소까지 차 타고 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게으름과 속도에 대한 자발적인 저항이랄까?!

소주 한 잔 올리고 묵상에 든다. 까마귀 울음소리와 어린아이 우는 소리 들린다. 사방팔방 눈길 닿는 모든 곳에 자리하는 묘소들의 장려(壯麗)한 대열. 그리고 넘쳐나는 햇살과 정밀(靜謐)에 가까운 고요가 공원묘지임을 알려준다. 시원스레 열린 전망 아래 수백 수천의 사연을 담은 사자들의 집이 묵연(默然)하다. 아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단출하다면 생사의 갈림길 역시 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

나이 먹고 나서 결혼식은 가지 않아도 장례식은 거의 빼놓지 않는다. 경사에는 사람 하나 없어도 그만이되, 애사에는 인총 하나 그리운 법 아닌가. 설령 무연한 분이라 해도 그의 자제와 맺은 연이 각별하니 짬을 내서 상가에 들르는 것이다.

아버지 산소에서 병풍처럼 서 있다가 홀연히 찾아온 생각은 단순한 것이었다. 죽음이 지척인데 인간은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고 다투며 욕하고 사는구나.

세월이 흘러서 나와 형제들마저 소멸하게 되면 아버지 묘소는 어찌 될 것인가. 여기 누워있는 저들의 묘소는 또 어떻게 될 것인지, 사념한다. 모친은 화장(火葬)을 주장했는데, 형과 아우가 산소 쓰자 해서 이리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세월 아니겠는가. 한 세대 남짓 지나면 불귀의 객이 될 것은 자명한 이치. 이런 묘터를 구하고자 했던 형제들의 바람 또한 더불어 스러질 터.

길을 달리고 달려 당도한 산소에서 인생의 허망함과 일상의 누추함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짠하다. 살아서 영화를 누리지 못한 부친이나, 늘그막에 병들고 쇠약해진 육신 탓에 괴로운 모친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하되 그것 역시 우리에게 허여된 숙명 같은 굴레라고 서둘러 변호한다. 다만, 한 가지. 허욕과 탐욕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저이들도 얼마나 많은 욕망과 희망과 기대를 이고 지며 살았을까, 생각하니 안쓰럽다. 들숨은 있되 날숨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망연히 깨우친 미망 아니었을까, 하는 상념. 성묘하고 나서 만감이 교차하는 산등성이에 태양만 홀로 장렬(壯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