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사회의 세시(歲時)풍습이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마저 사라지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 어릴 때 시골 농촌의 섣달 그믐은 새해맞이 준비 기간이었다. 가난하지만 집집마다 쌀강정을 만들고 찹쌀로 유과를 만들기도 했다. 조청을 고아 엿을 만들고 집집마다 밀주를 담가 제주로 썼다. 당시 맷돌에 콩을 갈 때 어머니 곁에서 팔이 아프도록 도운 기억이 난다. 설 며칠을 앞두고는 이웃 동네의 물레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아 오기도 하였다. 가래떡을 싣고 오던 우리 집 소가 얼음판에 넘어져 일으켜 세우느라 애태운 적도 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섣달 아름다운 풍광이다.

다시 2020년 구정(舊正)이다. 어릴 때처럼 기다려지고 설레던 마음이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나 내 고향 어릴 때의 세시풍습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구정 전야 섣달 그믐날, 우리 또래는 모두 친구 집에 모여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배고프던 시절 우리는 어려운 살림에도 쌀을 한 홉씩 추렴하여 밤늦게 밥을 해 먹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목이 쉬도록 노래하고 윷놀이도 하였다. 내일 입을 새 옷을 생각하면 신명나는 그믐날 밤이었다.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쉰다는 말까지 있었다. 같이 놀던 그 고향 그 동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설날이 되면 더욱 고향 사람들이 그립다.

설날 아침 우리 집안은 10촌까지 모여 합동 제례를 지냈다. 당시 우리 집안의 제관은 30명이 넘었고 마루뿐 아니라 댓돌위에서도 제사를 지냈다. 제일 서쪽의 큰집부터 작은집까지 제사 후 명절 음식을 나누다 보면 정오가 넘었다. 합동 제례 후 우리는 모두 동네 어른을 찾아 정성껏 세배를 드렸다. 6살 때 나는 동네의 천민인 고직이 어른께도 세배를 드려 조부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명절 막걸리에 취하여 호기를 부리던 집안의 어른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정월 한 달 동네 이곳저곳에서는 재미있는 윷놀이가 벌어졌다. 아랫동네와 윗동네로 나누어 놀기도 하고, 며느리와 딸네들이 편을 지어 윷을 놀았다. 당시 동편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서편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까지 있었다. 정월대보름 뒷산의 달불놀이는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둥그렇게 쌓아 올린 생솔나무 달집에 불을 붙였다. 불이 활 활 타오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달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마을입구에서는 동서로 나눠 줄 당기기기도 하고 제기차기와 팽이놀이도 하였다. 지금은 고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세시풍습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며칠 전 고향을 찾아가지만 그 옛날의 그 풍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이웃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인정이 넘치던 고향의 풍습은 찾을 수 없다. 옛날의 함께하던 놀이 문화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요즘 아이들은 눈만 뜨면 게임에 빠져 들고, 이제 스마트폰이 그들의 노리개가 되어 버렸다. 공동체가 아닌 혼자 즐기는 개인주의 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각박한 세상의 ‘고독한 군중’이 되어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빈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