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영화 <비트>는 1997년 5월 3일에 개봉했다. 당시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대구 동성로의 한 극장에서 영화 <비트>를 봤다. 1997년은 정초부터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부도, 도산하며 한국 외환 위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해였다. 12월 3일, 한국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의 혹독한 관리에 놓이게 된다. 경제 관료와 재벌, 정치인, 언론, 기득권층의 도덕적 해이와 위선으로 수많은 서민이 영문도 모른 채 해고와 실업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니까, 1997년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무가 큰 도끼에 찍혀 휘청거리던 해였다. 크고 작은 벌레들은 배를 불렸지만, 가냘픈 나무초리와 이파리들만 우수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1997년을 기점으로 명작들을 쏟아낸다. <비트>, <초록물고기>,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박하사탕>, <공동경비구역 JSA>, <동감>, <파이란>, <번지점프를 하다>, <봄날은 간다>, <친구> 등이 그것이다. 영화 제목만 보고도 그때 그 당시의 장소와 상대를 추억으로 소환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특히, 영화 속 명대사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접속>의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는 수십 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명대사다.

최근에 영화 <비트>를 다시 보다가, 로미(고소영)의 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먼저야.”와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 나만 빼고.”였다. 97년 당시에는 감각적인 영상에 휘둘려 대사를 음미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십여 년이 흘러 다시 보니 곱씹어 볼 만한 명대사, 명장면이 많았다. 입시지옥에서 친구를 잃은 우등생 로미는 요양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돈을 벌겠다는 목표로 분식점을 차린 환규(임창정)는 사기를 당하고 인부를 칼로 찌른다. 감옥에서 나와 환규가 다시 한 일도 역시나 포장마차를 여는 것이다. 폭력 조직에서 중간 보스로 승승장구하던 태수(유오성)도 배신을 당하고 끝내 죽음을 맞는다. 태수를 구하러 갔던 민(정우성)도 만신창이가 된다.

그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 없는 영화다. 1997년의 청춘과 2020년의 청춘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명문대에 진학하려는 이유도, 돈을 벌려는 이유도, 조직에서 승진하려는 이유도 모두 행복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명문대에 진학하면, 돈을 많이 벌면, 승진하면 행복할까? 그때도 “모두 행복한 것 같아, 나만 빼고.”라고 아니 말할까? 지인의 SNS를 훔쳐보면서 부러움과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들보다 더 자랑거리가 많아지는 것일까?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말, ‘행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