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의 미소는 어디에… 봉화 지림사(智林寺)

지림사 경내에 있는 국보 제 201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지림사는 봉화군 물야면 문수로 449-66에 위치해 있다.
지림사 경내에 있는 국보 제 201호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지림사는 봉화군 물야면 문수로 449-66에 위치해 있다.

오염되지 않은 산세를 자랑하는 청정지역 봉화,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국을 지닌 북지리 호거산 자락에 지림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쪽을 바라 보다 멀리 서광이 비치는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지림사 일대는 ‘한절’이라 불리는 큰 사찰과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조선 정조 때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혹은 ‘축서사로 인하여 사세가 기울었다’는 등의 이유로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1949년경에 한 승려가 법당을 세우고 수월암이라 불렀다. 땅속에 묻혀 있던 마애불여래좌상을 발견하여 지림사라는 이름을 되찾아 다시 불사하여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부석사 가는 길목, 너른 들녘을 외다리 물새처럼 지림사가 지키고 있다.

지림사에는 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높이 4.3m 부조형식의 거대한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201호)이 있다. 현재까지 파악된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모두 195점으로, 이 가운데 국보는 7점뿐이다. 그 중 하나가 북지리 마애불여래좌상이다. 자연 암석을 파서 만든 감실은 무너지고 보호각 속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듯 눈길은 동북쪽으로 향한다.

일주문이 없는 경내에 들어서자 멀리서도 마애불상이 눈에 띈다. 새로 지은 전각들은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너른 마당은 더 황량해 보인다. 단조로운 절 풍경이 마애불의 존재감을 훨씬 크고 웅장하게 한다. 거침없이 위협적으로 불어오던 바람도 지림사 마당에서는 포복하듯 엎드리고, 척추를 곧추세운 이들조차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장중함이 더 놀랍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몸이 먼저 저기압의 신호를 감지하듯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절부터 하게 된다. 나의 기도가 하루살이의 무심히 내젓는 날갯짓과 무엇이 다르랴만, 흔들림 없고 끝없이 아늑하면서도 평온한 기운에 사로잡힌다.

나를 따라다니던 수식어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가볍다. 태생의 동물들만이 갖는 징표인 배꼽 한가운데 앉아 있는 기분이다. 모체와 분리되는 최초의 단절, 불안은 그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삶의 젖줄이며 생명줄이 되어준 나의 모든 기도가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상처투성이 마애불이 내뿜는 아우라에서 슬픔이 묻어 나온다. 마애불을 쳐다볼수록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외경함에 찬탄할 뿐이다. 온갖 고난과 아픔을 이겨낸 세월이 안겨준 훈장을 모를 리 없다. 마애불의 장엄한 위엄 뒤로 인간적인 고뇌가 크게 다가온다. 움츠러든 어깨와 풍화와 훼손으로 떨어져 나간 오른손, 보일듯 말듯 한 미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묵직하게 가슴을 헤집는다. 일상의 번잡함과 흔들림을 내려놓고 나를 찾던 여느 때와 달리, 나는 하나의 미약한 생명체가 되어 마애불을 바라본다.

얼마나 많은 비바람이 다녀갔을까? 나는 마애불의 사라진 미소를 찾아 헤맨다. 숨은 그림을 찾듯 세상 빛을 보던 날의 온화한 표정을 상상하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실눈을 떠보지만 좀처럼 잡히질 않는다. 군데군데 깨지고 뭉개진 자리에는 민초들의 한과 슬픔이 두껍게 녹아 흐른다. 처음 누군가가 혼을 불어 만들었을 그 옛날의 선명한 미소가 그립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수천 년 전, 누군가의 간절한 불심에 의해 존재감을 드러낸 마애불, 순수한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경외의 옷을 입는 순간 고난은 시작되었으리라. 무릎을 꿇고 간절함을 호소하는 기도가 바람이 되어 밀려든다. 마애불의 가슴을 툭 치면 역사가 남기고 간 수많은 아픔들이 선혈처럼 쏟아져 흐를 것만 같다.

길고 긴 옹이진 세월을 건너왔을 마애불의 심경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언어의 경계 저쪽 너머에서 마애불은 무심히 앉아 있고, 사람들은 보물을 찾듯 숨어 있는 미소를 찾아낸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쉬운 일이 나에게는 번번이 어렵고 힘들다. 때가 되면 누구나 돌아가야 할 가장 근원적인 곳, 언어가 없는 그 길목에도 마애불이 있을 것 같다.

바람을 동무 삼아 할머니 한 분이 걸어오신다. 자그마한 육신과 소박한 몸놀림, 더 이상의 욕심도 없어 보이는데 더 내려놓을 것이 있으랴. 쇳소리가 날 것 같은 무릎관절은 절을 허락할 리 없다. 선 채로 삼배를 올리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거친 세월의 숨결이 선명하다. 할머니께 물었다. 아프지 않고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셨는지를.

“살아온 대로 가는 길도 정해져 있지. 엉터리로 살아놓고 이제와 그런 기도하면 못써. 그건 도둑놈 심보야.”

합죽한 웃음 한 자락 흘려놓고 또 법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신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잔잔한 겨울 햇살 같은 미소가 걸려 있다. 그것은 여유와 달관이 빚어내는 마애불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