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말들이 거칠다. 생각을 나누고 소통을 이어가려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면을 채우는 언사가 투박하고 공격적이다. 부드럽고 유연한 언어를 사용하면 뜻을 충분하게 전하지 못하기라도 할 것처럼, 언중(言衆)이 만나는 표현들은 날카롭고 뾰족하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여러 생각을 짧은 한마디로 정리해 줬을 때 이렇게 부른다. 통쾌하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 한마디가 어떤 결과를 빚는지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감동하여 마음을 움직이기보다 칼날이 되어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생각을 바꿔 새롭게 다짐하기보다 마음 문을 영영 닫아걸게 했다면. 대화와 소통의 문이 열리기보다 그 한 마디로 다시는 마주 대하지 않게 된다면.

말로 겨뤄야 한다. 생각은 견주어야 하고 의견은 개진되어야 한다. 특히 나라의 앞길을 가늠하고 조정하는 일은 사리에 맞아야 하고 논리가 닿아야 한다. 부족한 이치를 막말로 이기고 모자라는 논리를 혐오와 단절의 표현으로 차단하면, 생각이 더는 나아갈 수가 없고 현실은 점점 힘들어만 간다. 속이 시원한 끝에, 속만 시원하고 말았다면 이는 소통이었을까 배설이었을까. 말로 한 펀치 먹이는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생각을 모아 더 나은 소통의 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말재주 좋은 그가 뱉어낸 한 마디가 상대에게 깊은 절망을 안긴다면, 말이 오히려 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벽, 그것도 소통의 절벽이 생겨나지 않을까. 단절과 반목, 질시와 냉대는 그렇게 생겨나지 않았을까.

칼처럼 깊이 박히는 표현을 고대하기보다 생각깊은 논변을 기대했으면 한다. 말을 하는 이도 촌철살인에 ‘속깊은 지혜’를 담기로 하고, 언론은 더 이상 ‘그 한 마디’에 기대지 않았으면 한다. 속이 시원해 이기는 게 아니라 소통을 이어가야 공동체가 일어날 수 있다. 촌철살인격 한 마디를 찾느라, 감정과 편견에 치우치면 이내 막말이 되고 공격적 언사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언론이 제목장사를 하고 종교가 폭압적 언사로 어지러우면 국민은 누구를 믿고 세상을 접할 것인가. 속 시원할 그 한 마디에는 전달효과도 물론 있겠지만, 치명적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촌철이 살인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되고 말 것인가. 말을 하려거든 누구를 이겨 올라서는 걸 넘어, 공동체에 유익한 뜻이 담기도록 유의할 일이다. 그 말을 받아 살피고 새기면 더욱 슬기로운 지혜가 솟아오르게 담론을 이어갈 일이다.

‘주홍글씨’를 지었던 작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단어와 문장은 쓰는 사람에 따라서 선이든 악이든 피어나므로, 문제와 희망을 함께 담는다’고 하였다. 조선의 한 시조는 ‘말로써 말많으니 말말을까 하노라’고 하였던가. 변화와 개혁을 실천해 가려면, 겨루고 벼룰 것은 결국 생각의 힘이다. 그 힘을 바르게 표출하기 위하여 심사를 가다듬어야 한다. 새 해, 정치의 계절에는 특별히 힘과 뜻을 담은 무게있는 말들이 잔치를 벌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