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심씨 만석꾼 집안 11대 주손 심재오 씨

송소고택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증조부 심호택의 이야기를 들려준 심재오 씨.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작은 역사’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가장 유효한 방식이 인터뷰. 하여 누군가를 만나 그의 내밀하고 세세한 사연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그걸 문장으로 옮긴다는 건 힘겹지만 즐거운 작업이다. 2020년 본지는 경상북도 각처에서 ‘작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러한 인터뷰의 축적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역사를 넘어 경북의 역사를 직관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라 믿는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질책을 기대한다.   

청송 심씨(靑松 沈氏) 심처대의 집안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9대를 이어간 ‘만석꾼’이었다. 단순히 만석꾼이라 하면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전통 도량형에 따르면 쌀 만 석은 1천440t이다. 이 정도 양의 벼농사를 지으려면 최소 800000평의 땅이 필요하다. 서울 여의도 면적 3분의1에 해당하는 무시무시한 넓이.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만석꾼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을 통틀어 40명이 되지 않았다. 상위 0.000001%의 부자인 셈이다. 이제 대충이나마 감이 오실지 모르겠다.

예전에 청송과 안동을 비롯한 영남 북부에선 이런 말이 떠돌았다.

“날아가는 새라면 모를까, 청송에서 남북 100리를 가면서 심부자댁 땅을 밟지 않을 방법은 없다.”

세상엔 고약한 부자도 적지 않다. 집에 10kg이 넘는 금괴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 여러 개, 수억 원의 현금을 숨기고 살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 위장이혼을 하고, 가주(家主)의 무덤에 풀이 마르기도 전에 경영권을 두고 재벌 남매와 모자가 다투는 경우를 신문 지상이나 TV 화면을 통해 보는 게 요즘 세태다.

 

조선 영조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9대 이어오며
의병자금 조달·국채보상운동 등 적극 동참하며
해방 후엔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등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만석꾼 집안
고교 때 부친 사망 후 집안 큰 살림 물려받아
친구 보증·사업실패로 100억대 자산 잃었지만
‘분수를 알고 검소하게 살라’는 가풍 지키며 살아

◇청송에서 살던 어떤 ‘양심적 부자’ 이야기

그렇다면 청송 심부자 집안 사람들은 어땠을까? 아래 문헌을 통해 드러난 몇몇 기록을 잠시 소개한다.

고종 31년(1894)을 전후해 나라에선 “이제부터 은화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만석꾼이었던 심호택이 짊어져야 할 납세의 의무는 엄청났고 또한 무거웠다.

그러나 꼼수를 쓰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가졌던 논과 밭을 상당 부분 팔아 은화를 마련했다. 의성에서 청송으로 은화를 운반하는 행렬이 족히 3~4k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내야 할 세금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경상도도 마찬가지. 이때 청송 일대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눈을 피해 알게 모르게 가장 많은 군자금을 의병에게 전달한 게 심호택이었다는 걸 부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심호택은 신상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일본에서 도입한 차관을 한국인이 갚자는 국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심호택의 아들과 손자였던 상원과 운섭은 1945년 해방 이후 자신이 소유한 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지식인의 최고 가치는 앙가주망(engagement)이고, 부자들의 최종 지향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돼야 하지 않을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에 보여준 청송 심씨 일가의 행위는 앙가주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동시에 실천한 희귀한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만석꾼 집안의 11대 주손(胄孫)을 만나다

진눈깨비가 가늘게 흩날리던 지난 6일 오후. 심호택의 호를 따 지은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松韶古宅)에서 심호택의 증손자이자 심운섭의 외아들인 재오(65)씨를 만났다.

만석꾼 집안의 마지막 시절을 지켜보며 성장한 그는 속된 말로 하면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다.

딸만 내리 넷을 낳았던 아버지가 쉰 살을 넘겨 본 아들. 집안의 사랑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심운섭은 자식에게 엄격했다. 아들의 잘못 앞에서는 회초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말수가 적고 엄했던 아버지는 심재오 씨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세상을 떴다. 적지 않은 땅과 건물, 현금과 송소고택의 보물급 골동품이 스무 살이 채 안 된 재오 씨 앞으로 남겨졌다.

거칠 것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받는 월급은 아내 용돈으로 내주고, 자신은 물려받은 돈을 헐어 사람들에게 인심을 썼다.

친척과 친구들이 찾아와 “나 너무 힘들고 어렵다. 좀 도와줘”라고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못했다. 세상의 어두움과 어려움을 보지 못하고 귀하게 자란 만석꾼의 자손. 하지만 부자의 삶이라고 부침(浮沈)과 굴곡이 없을까.

심재오 씨가 서른아홉 살이던 때. 친구의 대출 보증과 기울어버린 사업 탓에 130여 필지 100만 평이 넘는 땅과 서울 대치동 아파트, 귀한 골동품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100억 원대의 자산이 닥쳐온 풍파로 인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렇게 생의 낭떠러지에 몰렸는데도 곁을 지켜준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스물넷에 재오 씨 집으로 온 아내는 100세 시할머니를 2년, 칠순의 시어머니를 20년간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하면서도 심재오 씨는 담담했다. 조부와 부친이 그랬다더니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건 청송 심씨의 가풍(家風)인 것인가? 조금은 세속적이지만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힘든 시절도 있었군요…. 속되지만 여쭐게요. 지금도 부자이십니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간명한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왔다.

“마음이 부자지요.”

이 말을 들려주는 심재오 씨의 얼굴은 회갑을 훌쩍 넘긴 나이답지 않게 너무나 순수하고 맑았다. 자신의 귀염둥이 여섯 살 손자를 자랑할 때처럼.

◇“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면…”

심재오 씨와의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을 넘겨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 핵심만을 아래 옮겨본다.

-증조부 심호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친과 조부는 원체 말씀이 없는 분들이었다. 그랬기에 증조부에 관한 세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자랐다. 자화자찬을 경계하는 어른들이기도 했다. 의병 봉기 때 군자금을 지원했다는 것과 국채보상운동 청송·영양 지부장이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관련 자료와 집안 어르신들의 전언을 통해 알게 됐다.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운 건 ‘항상 행동을 조심해 남에게 욕을 듣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인간살이와 세상살이의 기본이었다.”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부 부자들의 일탈을 어떻게 보는지.

△“부자가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악의적인 방식으로 세금을 피해가고, 도덕과 윤리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아무리 돈이 넘쳐나도 철학이 부재한다면 그 돈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자식들을 키우면서는 어떤 말을 들려줬는지 궁금하다.

△“우리 집안 가훈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소하게 살며, 선현들의 책 속에서 진리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지키기엔 너무 힘들지 않겠나?(웃음) 그래서 나는 보다 현실적이고 쉽게 이런 말을 딸과 아들에게 하곤 했다. ‘남들 보기에 부끄럽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만석꾼의 자손에게 묻는 질문이다.(웃음) 돈은 뭔가?

△“내가 철학자도 아닌데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글쎄… 돈이 뭘까? 도구가 아닐까싶다.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이 꿈을 펼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의미 있고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 허세와 과시의 수단은 결코 아니라는 것.”

21세기. 돈은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선 혹은,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초등학생조차 앞뒤 맥락 없이 “장래 희망이 부자”라고 말하는 시대.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기가 힘든 현실이다.

존경받을 만한 부자를 선조로 둔 심재오 씨의 ‘돈에 관한 생각’을 들으며 기자 역시 상념이 늘었다. 99칸 송소고택 기와를 때리는 비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운 건
‘ 항상 행동을 조심해 남에게 욕을 듣지 않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인간살이와 세상살이의 기본이었다.

/홍성식기자

    홍성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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