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어머니에게 듣기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두호동, 오천읍에서 살았다고 한다. 기억은 없다. 내 최초의 기억은 포항시 청하면 서정1리에서 시작된다. 서정1리 마을회관, 약방과 슈퍼를 겸했던 옆집, 포도, 돼지 농장, 안심저수지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내 유년의 고향은 서정리다. 그곳에서부터 내 첫 기억이 메모리에 저장되었다. 가을이면 지천에 갈대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당(돌무더기가 많은 하천)과 안심저수지에서 자주 놀았고, 포도와 참외, 수박 서리를 하다가 붙잡혀 혼나기도 했다. 친구들과 북한으로 가겠다고(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가방에 간식을 챙겨 산을 넘다 하늘에 헬리콥터가 지나가자 여기가 북한이구나, 화들짝 놀랐던 장면도 떠오른다. 마당이 넓은 집에 살았는데 아버지랑 평상에 마주 앉아 구구단을 잘 외운다고 칭찬을 받았던 일, 여동생이 변소에 빠졌던 일, 숨바꼭질하다가 넘어져 눈가가 크게 찢어진 일, 일요일 아침마다 마을회관에 청소하러 나가야하는데 그게 싫어 숨었던 일,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포대기에 갈비(소나무 이파리)를 가득 담아 메고 내려왔던 일 등이 떠오른다.

주저리주저리 유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내 인생의 첫 기억이 궁금해서다. 뇌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첫 기억이 재구성된다고 한다. 기억의 속성이 그러하듯 끊임없이 편집,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렬했던 내 인생의 첫 기억은 메모리카드에 쓰기 금지를 해놓은 것처럼 잘 보존되었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안심저수지에서 실컷 놀다 저녁 어스름, 갈대밭 사잇길을 돌아 집으로 오는데, 바람에 한들거리는 갈대와 코스모스와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리 마을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합일감, 자연의 충만함을 느꼈다. ‘나’라는 경계가 지워지고 사라지면서 이상한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내 삶에 환기되었다.

작년부터 아나빠나사띠(들숨날숨에 대한 마음 챙김) 명상을 꾸준히 하면서, ‘나’가 사라졌던 내 인생의 첫 기억을 자주 마주친다. 여태 살면서 나는 ‘나’가 너무 진해지고 강해지고 딱딱해졌음을 느낀다. 콘크리트 같은 아집과 망상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내가 참 불쌍하고 안쓰럽다. 콘크리트를 깨부수려면 강력한 압쇄기가 필요하다. 명상이 그것이다. 나는 명상이 아집과 망상이라는 콘크리트를 깨부수는 압쇄기라고 생각한다. 깨부수고 나오고 싶다. 그때의 어린 나에게로. 자연과의 충만한 합일로.

전현수 박사는 ‘생각 사용 설명서’에서 “첫 기억은 그 사람 인생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준다. (중략) 일반 사람의 경우에도 첫 기억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삶의 중요한 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첫 기억도 내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첫 기억과 지금의 내 모습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도 나를 있는 그대로 아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2020년에 벽두에 묻는다. 당신의 첫 기억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