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지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사는 유망정치인들의 사욕이 민심을 어떻게 난도질하는지를 드러내는 아픈 교훈을 남긴다. 외유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김대중(DJ)과 군사독재정권 치하 국내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속해온 김영삼(YS) 두 사람의 욕심 충돌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구렁텅이에 빠트렸었다. 당권·대권을 다 거머쥐려는 YS와 당권을 확보하려는 DJ는 결국 민의를 배신하고 대선에 모두 출마해 군사정권 연장을 헌납하는 참담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날의 역사에는 ‘죽 쒀서 개 주었다’는 비탄 딱지가 따라붙어 있다.

4·15 총선을 저만큼 앞두고 정치권에 폭풍주의보가 떴다. 여야 정당들은 일찌감치 총선체제로 전환되고 있고, 100일 전쟁을 채비하는 이합집산이 분주히 모색되고 있다. 유승민을 비롯한 바른미래당 위원들은 탈당을 결행하여 ‘새로운보수당’ 창당에 몸을 실었다. 때마침 유럽을 거쳐 미국에 가 있던 안철수가 정치 복귀를 선언해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정권의 무능과 야권의 무기력이 또다시 정치권 한복판에 ‘중도(中道)’ 화두를 불러세우는 중이다.

20대 총선의 결과는 분명히 여소야대(與小野大)였다. 그러나 임기 말로 다가오면서 국회 구성은 ‘4+1’ 등장으로 여대야소(與大野小)로 뒤집혔다. 국민이 만들어준 세력 판도를 정략에 빠진 정치꾼들이 임의로 뒤집어버린 셈이다.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뒷거래다. 선거에서 내린 국민의 명령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바꾼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중도’ 민심의 씨앗을 말살한 횡포는 용서 못 할 중대범죄다.

설 전에 돌아올 예정인 안철수의 행보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손학규의 ‘뻐꾸기 알’ 놀음에 만신창이가 된 유승민은 ‘새로운보수당’이라는 새 간판을 장만했다. 2년 전 유승민과 안철수가 야심 차게 추구했던 ‘개혁적 보수, 합리적 진보’라는 중도실험은 일단 실패했다. 유승민이 굳이 당명에다가 ‘보수’라는 개념을 넣은 것도 어정쩡한 ‘중도’의 위험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험의 산물로 읽힌다.

문제는 안철수가 ‘보수’라는 단어를 극도로 싫어했었다는 증언이다. 안철수에게 변화가 있지 않다면, 선택지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전히 진보 민심을 등에 업고 중도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정치행로 이정표라면, 안철수의 귀국은 보수정치에 또 다른 위협이 될 따름이다. 더욱 강력한 4+1 또는 5+1이 보수정치의 말살을 넘어 민주주의를 통째로 위협할 개연성마저 있다.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누군가 들어올 자리를 먼저 비워주는 게 지혜다. 유승민은 비워놓고 있는가. 안철수는 얼마나 비우고 돌아오나. 우리 정치사가 명료하게 알려주는 교훈은 뚜렷하다. 비우는 자에게 길이 보인다. YS와 DJ처럼 또다시 스스로를 비우지 못해 역사에 죄를 짓는 길을 갈 것인가. 참다운 ‘중도’ 민심을 개척해 양극화의 지옥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이 나라 정치를 선진화해줄 시대의 참 리더는 과연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