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파리의 일출과 이용악 시인

프랑스 파리 샤를드골공항의 일출. 희망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태양과 멀리서 먼 곳으로 희망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가 만나고 있다. /사진제공 구창웅

누군가 “장시간의 비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 답변으로 ‘책’ 외에 다른 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륙 후 안정된 고도에 진입만 하면 비행기는 버스에 비해 흔들림이 덜하다. 마흔다섯 살이 넘어서면서는 이른 노안(老眼)이 온 탓에 덜컹거리는 버스나 기차에서의 독서가 힘들어졌다. 어지럽기 때문이다.

기자의 경우 최장 거리의 비행은 ‘인천-프랑스 파리’ 노선이었다. 대략 12시간 30분 남짓.

그 이전 태국 방콕에서 출발해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를 탄 적이 있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그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환승을 한 터라 피로와 지겨움이 덜했다. 물론 공항 대기실에서 담배도 두어 개비 달게 태우고.

10시간 안팎으로 비행기를 탈 때면 항상 책 2권을 챙긴다. 시집과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시집은 때에 따라 바뀌지만, 트리나 폴러스는 항상 변함없이 여행의 가장 귀한 친구로 역할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처음 접한 건 20대 초반. 단순한 문장과 더 단순한 그림만으로 징그러운 애벌레가 날개 고운 나비로 변이(變異)하는 극적인 과정을 지극히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 다시 봐도 놀랍다. 존재를 전이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희망’을 지키고, 그걸 버리지 않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닌 게 ‘존재 전이’.

미움에서 사랑으로, 그리움에서 만남으로, 고통에서 희열로, 수난에서 성취로, 저주에서 공존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이 모든 변화 과정에서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하는 게 바로 ‘희망’이다.

비행기 안. 공짜로 주는 위스키도, 좁은 좌석에 앉아 꾸역꾸역 먹는 기내식도, 이어폰을 끼고 조그만 화면으로 보는 영화도 지겨워질 때면 트리나 폴러스가 꽃과 애벌레, 나비를 통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기자를 위로했다.
 

낡은 집

날로 밤으로/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대대손손에 물려줄/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모두 없어진 지 오랜/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털보의 셋째아들은/나의 싸리말 동무는/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차거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그날 밤/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노랑고양이 울어 울어/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나의 동무는/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의 아홉 살 되던 해/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이웃 늙은이들은/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탐스럽게 열던 살구/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절망과 마주했을 때 더 필요한 게 바로 희망

가로와 세로처럼 명확한 반대 개념은 아니지만, 희망의 반대편에 자리한 단어는 절망이 아닐까. 둘은 자웅동체(雌雄同體)처럼 우리의 인식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다. 희망은 절망과 함께, 절망은 희망과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다.

‘꽃들에게 희망을’ 덮고 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으니, 차가운 북관(北關)의 바람 앞에서도 의연했던 ‘함경도 사나이’ 이용악(1914~1971) 시인의 ‘낡은 집’이다. 행과 행 사이에서 ‘절망’의 삭풍이 뼈아프게 부는. 이런 노래다.
 

지켜야 할 희망과 꿈을 말해주는 트리나 폴러스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
지켜야 할 희망과 꿈을 말해주는 트리나 폴러스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희망’을 지키는 2020년이길

조선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이른바 영달(榮達)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고위급 친일파’ 몇 명만이 원했던 참혹한 시대 일제강점기. 이용악은 그 시절을 살았다. 시인의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

시 ‘낡은 집’에선 끝끝내 머물고 싶던 고향을 타의에 의해 버리고 낯선 곳으로 발길을 향해야 했던 당대 민초들의 절절한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100년 전엔 어떤 재산보다 귀했던 아들을 여러 명이나 낳고도 그 아이들이 제대로 커갈 수 없는 세상임을 알았기에 ‘소주에 취한 털보(아저씨)의 눈이 붉던’ 시대, 아이들조차도 ‘가난 속에서 늘 마음 졸이며’ 살던 시대, ‘꽃피는 철이 와도 뒤울안에 꿀벌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 참혹한 시대.

인용한 이용악의 문장에선 ‘절망의 시린 바람’이 쌩쌩 불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낡은 집’에서 절망과 파국의 냄새만을 맡았다면 그건 시를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정들었던 고향 집과 식구나 다름없던 소를 키우던 외양간을 버리고, 물설고 낯선 북쪽 땅으로 쫓기듯 떠나간 사람들. 그래서 살던 집이 흉집(凶家)이 됐지만, 그들은 희망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시절 조선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로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문학적 허구’인 시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있으니까.

이용악의 고향 사람들을 비롯한 20세기 초반 한국의 유랑민들은 세상 어떤 정착민보다 뜨겁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살았다. 옮겨간 땅의 자랑스러운 주인이 됐다.

식상한 말이지만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징그러운 애벌레도 아니고, 나라를 빼앗긴 서러운 백성도 아니다. 그러니, 왜 희망을 버릴 것인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트리나 폴러스와 이용악을 떠올리는 새로운 날의 새 아침. ‘겨울’을 절망의 은유로, ‘새’를 희망의 메타포로 상정해 지난밤 쓴 졸시를 다시 읽는다. 올해는 절망을 이기는 희망을 뜨겁게 껴안기로 다짐해본다.

겨울, 그러나 희망이 온다

계절 모르고 짓찧고 까불던 새
취기에 깨어난 아침
새하얀 첫서리에
꽁지를 말아 올리며
푸르르 떤다
언제나 한발 늦게 세상을 깨닫는
아버지 닮은 새

까막까치 발을 얼리며
발갛게 발갛게
잃었던 계절이 온다
다시 희망의 노래가 들린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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