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새해 첫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이 세상 이토록 장엄이고 충만인데/ 무슨 소원이 더 필요하랴//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것으로/ 완성이었다’- 졸시 ‘원단일출’

# 새해 첫날입니다. 동해 바닷가에서 일출을 보았습니다. 삼백예순다섯 날이 든 선물 보따리를 뜨겁게 받아 안은 마음입니다. 그게 다 내 몫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하루하루가 다행과 감격의 날들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저토록 찬란하게 열리는 하루를 무상으로 받는 것보다 더 큰 축복과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벅찬 황송과 감격 앞에 모든 탐욕과 사악함과 어리석음은 부질없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여생(餘生)의 첫날입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오늘의 강이 어제의 강물이 아니듯 어제와 똑 같은 오늘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오늘은, 전인미답의 설원처럼 설레고 떨리는 첫날입니다. 첫날에는 과거가 없습니다. 어제의 그늘이 없고, 아무것도 연연할 것이 없습니다. 첫날에는 새롭지 않은 것이 없고, 꿈과 희망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시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몇 날이 더 남았는지는 몰라도 이 아침, 눈부시게 찬란한 남은 생의 첫 해가 떠오릅니다. 이 한 해가 모든 분들에게 감격과 황홀의 선물보따리기를 바랍니다.

# 나무도 짐승들도 함께 맞는 새해입니다. 나무나 짐승들은 달력이 따로 필요없지만, 나는 새해라고 지난 달력을 내리고 새 달력을 걸었습니다. 직사각형 칸 속에 커다란 고딕체 숫자들이 빼곡한 달력입니다. 새 달력 속의 숫자들은 아직 사용하지 않은 배터리인 셈입니다. 하루에 하나씩 갈아 넣는 365일분 새 배터리입니다. 돈이 많거나 힘이 세다고 더 주지는 않는 딱 일 년 치인데, 중간에 본체가 파손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수입니다. 나무와 짐승들에게 달력이 따로 필요없는 것은 그 몸이 달력이기 때문입니다. 몸속에 시계와 달력이 들어 있어서 안 보고도 시간과 계절을 아는 거지요. 사람도 원래는 그랬지만 한눈팔다 잃어버리고 부랴부랴 달력을 만들고 시계를 만든 것이지요. 나무와 짐승들이 맨몸으로 가는 길을 시계 차고 달력 보면서 허둥지둥 쫓아가는 꼴이라고 할까요.

사람들은 새해를 맞는 법도 잊어버렸습니다. 해맞이다 뭐다 부산을 떨지만 원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지요. 나무들과 청둥오리들이 어떻게 이 아침을 맞는지를 보면 알지요. 겨울나무와 청둥오리들이 어떻게 혹한의 밤을 견디는지는 우리도 발가벗고 하룻밤 밖에서 지내보면 알 일이고요. 각자가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 년 치 배터리를 받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보고 배울 이웃이 있다는 말로 새해 덕담을 대신합니다. 배터리 하나하나의 수명은 24시간이지만 전력은 제한이 없답니다.

# 보다 맑은 세상을 바랄진대/ 내가 한 줄기 샘물이 되어야 하고/ 보다 밝은 세상을 바랄진대/ 나부터 작은 등불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 정의도 평화도 자유도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