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짝을 지어 친구가 친구에게 스승이 될 수 있도록 서로 가르치는 방법입니다. 이 방식을 ‘하브루타’라고 합니다. 상대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탈무드를 해석하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한 시간의 탈무드 공부를 위해 2∼3시간 동안 본문을 연구해 옵니다.

그리고 둘이 끝장 토론하듯 상대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 거죠. 이런 방식의 질문과 토론을 매일 반복한다니 소름 돋습니다.

왜 그들이 미국의 ‘법조계’를 장악하고 있는지, ‘언어’를 다루는 언론, 출판, 방송, 영화 등을 독점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삶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훌륭한 삶을 누리기 위해 캐묻는 삶을 강조했고,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함께 도달하도록 상대를 다그쳤습니다. 100명의 사람을 찾아가면 오직 한 가지 ‘진리’에 도달하도록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지요. 즉 100대 1의 원리입니다.

유대인들의 접근 방식은 소크라테스와 반대입니다. 한 가지 정답을 캐내고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100명이 모이면 100가지 다른 다양한 관점들을 꺼낼 수 있도록 자극하고 거세게 몰아붙이는 겁니다. 100대 100의 원리인 셈이지요. 유대인 랍비들이 제자들을 자극하는 가장 치욕적인 말이 있습니다. “마따호쉐프!”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얘야. 너는 왜 ‘네 생각’이 없느냐!”

정현종 시인이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을 번역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르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며, 홀연히 ‘처음’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고, ‘끝없는 시작’ 속에 있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삶에 대한 다양한 질문으로 2019년을 마무리해 보는 건 어떨까요? 밝아오는 2020년을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