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언제든 시간이 지나도 반복되고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분명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지금은 단순한 제도나 의무 같이 내게 주어져 그 이유를 물을 필요 없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남겨진 것들 말이다. 어릴 때, 이유도 모른 채 부모님들의 손에 끌려 참석했던 제사 의례가 그렇고, 온 가족이 모여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처럼, 한 해의 정해진 때에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예의 관념이 꼭 그런 것들이다.

인간에게 있어 이렇게 반복되는 것들이 매번 다른 의미를 갖기 어려운 까닭은 반복되는 것들 사이에서 매번 의미를 챙기기보다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순 반복되는 일들을 행하기에 적절한 존재가 아니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하나하나의 일들에 의미를 담기보다는 기계화된 동작과 의식으로 반복되는 일들에 자기를 맞춰갈 수밖에 없다. 인간을 둘러싼 반복적인 의례들이 매번 새로운 의미를 갖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인간이 그러한 노동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된 것일 터이다. 그러한 의례에 담긴 큰 뜻이나 취지를 다시 설명한다고 해서 사라진 마음이 다시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반복되는 겉치레의 예의 속에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삶에 가끔씩 어떤 ‘마음’이 찾아오는 때가 있다. 어느 겨울밤, 누군가 밖에 온 것 같아 공연히 문을 열어보게 되는 것처럼. 혹은, 새벽녘 문득 울린 스마트폰 알림에 이제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떤 기억들이 찾아오는 것처럼. 연말 같은 시기가 되면 문득 찾아오는 그 마음은 이제는 관성화되어 버린 반복된 예의 관념의 근원을 깨닫게 한다. 그래, 그랬었지, 우리가 그것을 처음 행했던 것에는 바로 그런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것이 먼저였고, 어떤 것이 나중이었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겨울밤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백석을 떠올리고, 백석 시 몇 편을 읽곤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니, 의례나 의무 같은 것은 분명 아니다. 유독 겨울밤이 되면 찾아오는 그런 어렴풋한 ‘마음’을 백석만큼은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릇 시인이라면 자기 앞에 놓인 무표정한 반복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당연한 의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독 백석은 낯선 얼굴 너머에 들어앉아 있는 어떤 ‘마음’의 기원을 찾아낸다.

백석에게 있어 그 ‘마음’은 사방으로 눈이 내려 주변이 먹먹함으로 가득한 때, 온 가족들이 모여 보내는 명절날의 분위기로부터 온다. 그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반복되어 찾아오는 것이니, ‘원형’적인 것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니, 매번 반복되는 명절날이나 가족들이 모임이 먼저가 아니다. ‘마음’이 먼저다. 내 앞에 가득 사리워 오는 한 그릇의 국수 속에도, 어떤 날을 떠올리도록 푹푹 내리는 눈 속에도, 눈같이 하얀 달이 빛나는 밤에도 그 마음이 담겨 찾아오는 것이다. 마치 이제는 어떤 정신도 죽어버렸다고 생각되던 고도 자본주의시대에도 보들레르가 언어 속에서 맡았던 고대의 향기처럼. 백석의 시 속에는 어떤 오래되었지만, 그리 오래된 것만도 아닌 어떤 ‘마음’을 동반한 맛이 존재한다.

물론, 깊은 겨울 밤 따뜻한 방안에서 차갑고 시큼한 귤을 까먹으며, 백석 시를 맛보는 재미가 어디 그런 어렵고 복잡한 생각의 재미뿐이겠는가. 지금은 귀에 선 이북 사투리를 읽는 재미라든가, 마치 코끝이나 혀끝에서 맴돌 듯 느껴지는 감각도, 눈이 내리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를 읊으며, 데운 술을 한 잔 마시는 경험도 백석 시를 맛보는 겨울밤의 일부가 아닐 것인가.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