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에 자리한 심원사 전경. 심원사는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식물원길 17-56에 위치해 있다.
가야산에 자리한 심원사 전경. 심원사는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식물원길 17-56에 위치해 있다.

가야산 허리를 감으며 차는 심원사를 향해 달린다. 한적한 겨울 산사를 상상했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자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다. 큰 행사가 끝난 듯 많은 사람들이 총총히 심원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인적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지만 공양간 앞에는 여전히 남은 사람들로 어수선하다.

해인사의 말사인 심원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도은 이숭인이 심원사를 고사(古寺)라 칭한 시가 남아 있고 오랫동안 법등도 이어져 왔다고 전한다. 조선 중종 때 승려 지원이 중수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새로 지은 전각들 사이로 삼층석탑과 부서진 석조 유물들이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생각보다 큰 절이다.

북적이는 산사의 정경이 낯설다. 고즈넉한 산사 분위기에 익숙해 오다 이토록 많은 사람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스님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불자들 사이에서 나는 이방인처럼 어색하다. 술렁이는 인파를 피해 대웅전 법당으로 들어선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 나를 내려놓지만 마음은 아득한 허공처럼 잡히지를 않는다.

대웅전을 나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종각 앞에 놓인 팥죽을 보고 뒤늦게 동지임을 알았다. 특별한 날의 기도는 무엇이 다르기에 이토록 사람이 모이는가. 눈앞에 펼쳐진 비슬산과 가야산의 빼어난 경관 앞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신산하다. 스님과 차담을 나누기엔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

‘문 없는 문을 뚫는다’는 무문관(無門關)이 심원사에도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장 달려왔는데 허탈하다. 깨우침의 길을 뜻하는 문 없는 문, 무문관 수행의 규범은 매우 엄격하여 일체 문밖을 나올 수 없으며 조그만 창구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심원사의 무문관도 바깥에 자물쇠가 있어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지만 하루 한번 문이 열린다고 한다.

스스로 화두를 잡고 고행의 길을 선택한 스님들이 계시는 상왕선원(象王禪院), 청정한 눈빛들이 문풍지를 울리고 허기진 언어들은 바람에 업혀 달아날 것만 같다. 술렁이는 절 분위기와 상관없이 상왕선원은 섬처럼 고독하다. 마치 비어 있는 것처럼.

이름을 남긴 대선사들의 면벽 수행과 깨달음의 이야기는 수없이 회자된다. 스님이라면 한번쯤 꿈꾸고 도전해 볼만한 유혹이 담긴 고행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꿈꾸기는 쉬워도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는 쉽지 않다. 안거 경력 40년이 넘은 선원장 스님에서부터 선방 생활을 오래한 구참 스님들에게만 허락된 고독이다.

숭모전으로 향하는 높다란 계단 좌측편으로 상왕선원이 또렷이 보인다.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은 삭제된 일기장을 대하듯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대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단청 없는 소박한 전각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더없이 작고 평범한 나와 팥죽 같은 미소를 안고 총총히 사라지는 불자들, 상왕선원 앞에는 깊고 도도한 강물이 흐른다.

의식주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하품인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나 역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발버둥쳐 보지만 언제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욕망과 번뇌, 나태와 게으름 앞에서 속수무책 넘어질 뿐이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심원사를 다녀온 후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또 나를 흔들었다. 일체의 외출도 허락되지 않는 봉쇄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기로 약속한 수도사들의 눈빛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엄격한 규율과 절제, 기도와 노동, 청빈함으로 살아가는 위대한 침묵 앞에서 내 안에 뜨거운 것이 일렁였다.

구멍이 난 양말과 소품들, 가난을 통해 얻어지는 무소유의 즐거움, 육신의 노화와 질병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는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했다. 이웃과 인류를 향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고독이 면류관이 되어 내 안을 밝힌다. 평범한 사람들은 범접조차 할 수 없는 무문관 수행에 비해 수도사들의 삶은 좀 더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가톨릭의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과 불교의 무문관, 종교는 달라도 영원의 진리를 좇는 목표는 닮았다. 신과 하나가 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오로지 고독과 싸우는 길을 택한 사람들. 참된 믿음은 교회나 절, 성서나 경전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절제와 고독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다면 나의 일상도 달라지리라.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어느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 연말이다. 오늘 하루의 평화도 누군가의 기도와 자비의 힘으로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삶을 헌신할 만한 간절한 목표가 없다. 하지만 불어터진 빵조각 같은 삶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넘어지고 방황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채찍을 가해야 할 시시포스의 운명을 죽는 날까지 사랑하리라. 그것이 하품인생의 어설픈 고독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