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태엽을 감는 벽시계가 하나 있다. 누가 버리는 걸 가져와서 내 방에 걸어놓은 것이다.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멈출 때마다 태엽을 감아주면 다시 살아나서 잘 돌아가곤 한다. 시계가 빨리 가면 나사를 풀어 추를 좀 늦추어 주고 늦으면 반대로 추 밑의 나사를 좀 죄어주면 빨리 간다. 전형적인 아날로그 방식인데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고장이 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가서 좋다.

시계추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똑딱똑딱 소리를 내는 데 평소에는 거의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다른 소음이 없는 고요한 시간에도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월도 그렇게 의식을 못하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한 해가 언제 다 지나가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세월 가는 줄 모르게 바쁜 사람들도 가끔씩은 세월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연말이면 송구영신이란 말을 많이 한다. 묵은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으라는 말이니 분명 덕담이 될 것이다. 일부러 보내고 맞지 않아도 저절로 가고 오는 것이 세월일진대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지난 것에는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빈 마음으로 새 날을 맞으라는 뜻일 것이다. 말은 쉽고 지당하지만 사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세상의 온갖 불화와 분쟁의 대다수가 바로 구습과 편견과 고정관념 따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는 식의 꽉 막힌 옹고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벌어지는가.

새것을 맞는다는 것은 새로운 문물이나 유행을 쫓는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 성서에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세월이 흐른다고 자연현상의 원리가 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아무리 고목이라도 살아있는 한 봄이면 새 잎을 내듯이 산다는 건 시시각각 송구영신 하는 것이다. 그런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건강한 삶일 것이다.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데 사람들은 탐진치(貪嗔痴)에 찌들고 막혀서 그게 잘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새것을 맞으려면 먼저 묵은 것을 보내야 한다. 재물이든 권세든 명예든 이념이든 기왕의 것을 다 버릴 수는 없을지라도 집착은 말아야 한다. 놓아야 할 것을 놓지 않고 보내야 할 것을 보내지 못해 아득바득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과거에 집착하는 자에겐 미래가 없고 이미 가진 것에 집착을 하면 새로움이 없다. 새롭지 않은 것에는 생명이 없으니, 송구영신을 잘 해야 하는 이유다.

해가 다 가도록 꽉 막힌 정국은 뚫릴 줄을 모른다. 이 정권이 출발하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적어도 막히고 닫히고 고착된 정권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지금까지의 어느 정권보다도 지독한 편견과 아집과 과거에 집착하는 고집불통의 행태를 드러내었다. 눈과 귀를 틀어막은 것도 모자라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말 그대로 전대미문이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참으로 송구영신이 절실한 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