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올해 읽은 책들의 목록을 살펴본다. 부지런히 읽는다고 읽었는데 성에 차진 않는다. 허생처럼 두문불출 7년 동안 책만 읽고 싶다. 과연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냥 행복할까? 솔직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뭔가 또 다른 것을 바라겠지. 1년 동안 딸에게 읽어준 그림책, 동화책을 포함하여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에 밑줄을 그었다. 밑줄 친 낱말이나 문장, 문단은 워드로 작성해서 갈래별로 모아둔다. 월동 준비를 하듯 차곡차곡 마음에 모아둔다. 겨우내 어쩌면 사는 내내 두고두고 꺼내어 쓴다. 마음의 양식이란 말은 헛말이 아니다. 좋은 문장은 좋은 음식과 같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피와 살이 되듯 좋은 문장을 읽으면 영혼에 빛과 온기가 돈다. 올 한 해 만난 좋은 문장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에서 만난 불편한 진실이다. “현대 정신의학은 삶에서 예상되는 많은 문제는 알고 보면 화학적 불균형으로 인한 정신 장애이므로 약을 먹어서 해결하라고 세뇌하는 쪽으로 너무 많이 나갔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어째서 우울증인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는 비정하고 무책임하다.”

메리 파이퍼의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란 책은 읽고 또 읽은 책이다. 다독(多讀)보다 더 좋은 것은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재독(再讀), 삼독(三讀)이다. 책이 너무 좋아 아끼는 지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했다. 고 장영희 교수의 스테디셀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처럼 서재에 두고 오래 읽을 책이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읽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비극은 아름다운 어떤 존재가 성장하고 싶어 하는데 다른 어떤 존재가 그것을 저지할 때입니다.”

흐로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담을 정리한 <보르헤스의 말>이라는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장은 ‘지옥’에 관한 보르헤스의 관점이다. “지옥에 관해 말하자면, 난 지옥이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영혼은 스스로 지옥이나 천국에 이르게 되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혼은 그 스스로를 거치면서 지옥이나 천국이 되는 거예요.” 언젠가부터 나도 천국이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해왔다. <논어> 위정편에서 ‘불혹(不惑)’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마흔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지만, 그것 또한 특정 나이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여긴다. 보르헤스의 영웅 에머슨은 “인생은 하나의 긴 인용문”이라고 말했다. 남의 글과 말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12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맵찬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다. 두문불출, 책 읽기 참 좋은 계절이다. 밑줄 긋기 딱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