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욱 회사원

가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뜨거운 햇볕은 얼굴과 몸을 태우는 듯하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다. 온몸은 땀 범벅이고 젖은 옷이 묵직하다. 힘들다. 청소년 시절 내 모습이다. 고된 훈련을 하는 이유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

88서울올림픽을 TV로 보면서 꿈이 생겼다. 복싱 문성길 선수가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올랐다. 그의 목에 금메달이 걸리는 순간 감전된 듯한 전율을 느꼈다. 멋있었다. 나도 저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오르겠다고 다짐했다. 그 순간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내 가슴에 새겼다. 심장은 뛰었고, 아무리 힘든 훈련도 내 꿈을 꺾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필자는 시합에서 고등부 최연소, 최우수 선수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전직 권투선수인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아버지도 기대가 컸다. 당신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합마다 우리는 함께 했고, 우승할 때마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

어느 날 사고가 났다. 훈련 중 왼손을 다쳤다. 수술을 받았지만, 신경이 끊어진 탓에 복싱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꿈과 희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밥도 먹기 싫었고 학교도 가기 싫었다. 그렇게 내 인생은 끝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출을 밥 먹듯이 하고, 술에 취했다. 학교에서도 문제아로 전락했다. 담임도 내 방황을 이해했지만, 방황은 더 심해졌다. 많이 울면서 답도 없는 질문만 던졌다. “왜 내게만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친구들도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꿈을 잃은 내 마음을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긴 방황은 아버지의 설득과 어머니가 흘린 눈물,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묵묵히 들어준 형들 덕분에 끝났다. 마치 차가운 얼음이 따뜻함에 스르르 녹아내리듯 마음이 풀렸다. 그 지점에서 새 희망이 보였다. 다시 심장이 뛰었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일까?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깨달음이 왔고 위기 속에 기회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후회한다고 해서 이미 늦은 것은 아니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깨달으면서 후회의 진정한 뜻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후회하며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이나 슬픔에 빠질 게 아니라 내 연약함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시간을 보냈다. 철학자의 말처럼 이미 늦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나는 또 다른 희망을 품은 것이다. 내가 스스로 어떤 마음을 품는가에 따라 절망에 빠질 수도 희망으로 마음 설렐 수 있음을 알았다

먼 여행을 떠난 주인공은 파랑새를 찾아 헤맨다.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파랑새가 바로 내 집에 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이야기처럼, 고등학교 시절 시련을 통해 희망이 저 멀리 밖에 있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음을 배웠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새 희망이 생겨나는 법이다.

그 깨달음은 내게 큰 선물이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생기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데 있어 큰 경쟁력을 갖추는 계기였다. 남들이 힘들어하는 일도 오히려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마음을 품었다. 누가 불만을 터뜨리면 나는 그 시간에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런 태도 덕분에 입사 첫해, 우수사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절망하는 때도 모두 내 안에서 시작하는 법이고 내 마음이 만드는 결과임을 배워갔다.

희망은 이미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을 키워 활활 타오르게도 할 수 있고 얼음처럼 차갑게도 할 수 있다. 시련은 사람을 단단하게 한다. 어린 나이에 깨달은 이 선물 덕분에 세상을 넓고, 깊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있었을까?

이틀 후면 즐거운 크리스마스다. 2020년도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성탄과 새해,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가장 귀한 선물을 받기 위해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2020년 한 해 동안 내게 펼쳐질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내 안으로 탐험을 떠나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