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우리가 무지개의 색깔을 7가지로 분절하여 볼 수 있는 이유는 시력 때문이 아니라 언어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대중매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러한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가치관 및 자아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 사람들이 접하는 매체들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 형태에 따라 보고 듣는 이의 사고에 막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즉, 어떤 단어나 어떤 표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문구를 접한 사람들의 사고의 방향이 무의식중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대중 매체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언어와 사유(여기서는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한 내용, 사물에 대한 느낌, 기억, 추상적 사고 등을 모두 포함시키는 개념으로 간주한다)의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 관점은 우리가 이미 전(前)언어적으로 이해한 어떤 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 언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유가 언어에 선행한다. (정확히는 사물이나 사태로 이루어진 세계→이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이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언어의 순서일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에 맞는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려고 애를 쓸 때, 새로운 물건이나 세태를 표현하려고 신조어를 만들 때, 사유는 언어에 앞서 이미 존재한다. 그리고 이때 언어는 사유를 전달하는 매체일 뿐이며 사유의 내용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두 번째 관점 즉 언어가 사유를 규정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스펙트럼인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깔로 지각하는 것은 무지개의 색깔을 일곱 가지로 표현하는 언어의 영향 때문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남녀차별적인 생각을 가졌던 근본적 이유도 그들의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역사와 전통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전술한 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 할 때나 신조어를 만들 때에도 우리는 ‘다른 단어들을 가지고’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television이라는 신조어도 tele라는 접두사와 vision이라는 명사의 합성어이다.)

즉, 우리의 세계에 대한 지각, 느낌, 사유는 언어의 틀 속에서 세계를 해석한 결과물이다. 갓난아이들처럼 언어라는 매체 없이 바라보는 세상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무지개의 색깔처럼 미분화된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

첫 번째 관점, 즉 사유와 언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에 따르면 언어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의식이 이 세계를 맑고 굴곡 없는 거울처럼 비출 수 있다.

가령 무지개를 바라볼 때 무지개가 가지는 스펙트럼이 우리의 의식에 그대로 반영될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언어는 사고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고 언어 역할을 이차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플라톤(Platon), 데카르크(R. Descartes), 로크(J, Locke), 칸트(I. Kan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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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번째 관점, 즉 언어와 사유는 분리불가능하며, 나아가 언어에 의해 사유가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언어의 규정을 받으며 이 세계를 해석한다. 언어의 규정을 받는 의식이라는 거울은 일그러지고 불투명한 거울이어서 이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의 의식은 스펙트럼 형태의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깔의 무지개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는 우리의 경험 혹은 감각적 지각은 사유에 바로 닿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필터를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사정은 이성적 사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진자운동 또는 낙하법칙이라는 이론(이러한 이론들도 언어로 되어 있어 우리들의 사유를 규정함을 명심하자.)을 가지고 끈에 매달린 돌의 운동을 관찰(엄밀히 말하면 해석)할 수 있을 뿐, 돌의 운동을 굴절되지 않은 형태로 의식 속에 그대로 비출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훔볼트(W.v Humboldt),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등이 있다.

미국의 현대철학자 로티(Rorty)는 “우리는 피부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듯이 언어의 바깥으로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라는 안경 없이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며, 언어라는 안경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이상, 렌즈의 굴절률(언어 속에 담긴 편견, 전통 등)로 인해 변형(해석)되지 않은 세상을 인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 언어로부터 해방된 어떤 성찰의 순간이 절대로 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순간이 인생에서 극히 예외적인 순간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만약 여러분도 언어가 사유를 규정한다는 두 번째 관점을 지지한다면, 앞 절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감각적 지각은 물론 이성적 사유조차도 언어의 규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상, 관념과 사실의 완전한 대응을 토대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