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최익남(崔益男)의 옥사와 우념재(雨念齋) 이봉환((李鳳煥)

장기향교. 유배인들이 머물다 간 유배지는 한 선비에게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학의 산실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 장소였다. 한양에서 유행했던 최신 학풍과 서적들은 유배인들을 통해 이 향교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1770년(영조 46) 11월 26일, 한양에서 이경오(李敬吾)란 선비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유배객의 신분이었는데도 지역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바로 초림체(椒林體)의 대가인 우념재(雨念齋) 이봉환((李鳳煥)의 장남이었던 것이다.

이봉환은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문사(文士)였기에 한적한 시골 현(縣)의 사족(士族)들이 그의 시편과 글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봉환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상소를 올린 최익남(崔益男)과 공범으로 간주되어 신문을 받다가 죽었고, 그의 큰 아들이 아버지 죄에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것이다.

시계를 잠시 뒤로 돌려보자. 1762년(영조 38) 윤5월 17일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사건에 이어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사도세자가 무더운 초여름 날 뒤주 속에 갇혀 8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은 것이다. 이런 처참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조정 대신들 중 누구하나 나서서 말리는 이가 없었다. 정권의 핵심에 있던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수방관했다. 소론에게 우호적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는 부왕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정에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洪鳳漢)이 실세로 있었지만, 그도 이 비참한 세자의 죽음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심지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오히려 반(反) 사도세자 세력에 가담했다. 홍봉한 측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집안의 당파적 이해 때문에 세자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냐는 논의까지 대두되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번창했다. 홍봉한은 영의정을, 홍인한은 우의정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뿐만 아니다. 홍봉한의 맏아들인 홍낙인은 대사헌, 둘째 아들 홍낙신과 홍낙임은 승지, 사촌인 홍송한은 형조판서, 조카인 홍낙성은 이조판서, 조카 홍낙명은 대사간과 대사헌의 자리를 각각 차고앉았다.

시간이 지나 임오화변의 충격이 서서히 정리되어 가면서 노론은 두 파로 갈라졌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시파와 죽음이 당연했다는 벽파로 나눠진 것이다. 벽파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그녀의 친정오빠인 김귀주가 축이었다. 이들은 영조의 믿음을 독차지하고 있던 홍봉한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래서 공홍파(攻洪派)란 이름을 붙였다. 반면 홍봉한을 지지하는 시파들을 부홍파(扶洪派)라 했다. 처음 홍봉한과 김귀주 두 외척 가문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세자가 사라지자 이제는 노론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때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돌아서 있었다. 김귀주는 그런 홍봉한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했다.

공홍파의 공격은 1770년(영조 46) 3월 22일, 청주 유생 한유(韓愈)가 올린 상소문으로 구체화되었다. 한유는 자신의 팔뚝에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내용을 새겨 넣고 도끼를 메고 상경했다. 그는 궁궐 앞에 나아가 엎드린 채 ‘홍봉한의 부자·형제가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청컨대 이 도끼로 먼저 나를 죽이고 뒤에 홍봉한을 처단하라’고 했다. 영조는 이 상소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홍봉한의 세력들을 공격하는 것이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한유를 귀양보내버렸다. 실제로 한유가 이런 행동으로 나오기까지는 공홍파의 사주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 상소는 심의지(沈儀之)가 올리려고 했다. 공홍파들은 심의지가 한양의 사족(士族)이기 때문에 영조의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청주에 살고 있던 한유에게 그 상소를 대신 올리도록 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770년(영조 46) 11월, 이번에는 부홍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이조 좌랑 최익남(崔益男)이 반박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새로 왕세손에 책봉된 동궁(東宮·정조)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와 사당에 성묘도 하지 않아 정과 예가 부족하고, 벽파의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당파를 짓고 있으니 처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는 영조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영조는 민감한 사도세자와 세손의 문제를 언급하며 나오는 것에 대해 발끈했다. 격노한 영조는 왕실에 대한 모종의 음해세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최익남과 연루자들을 붙잡아와 국문했다. 잡힌 사람들은 모두가 홍봉한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공홍파들은 ‘최익남의 배후에 홍봉한이 있으니 진상을 밝혀야 한다’며 공세를 취했다.

영조는 최익남을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상소문은 즉각 불살라버리게 하였다. 최익남은 유배를 떠나기도 전에 매를 맞아 죽었다. 이어서 영조는 홍봉한의 배후라고 의심되는 최백남(崔百男·최익남의 동생)·정석오(鄭晳吾)·이봉환(李鳳煥)·문희민(文喜珉)·이성보(李成普)·남옥(南玉)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봉환과 남옥은 투옥되어 신문을 받다가 장형(杖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최익남의 상소를 미리 빌려다 보았다는 죄로 이재휘(李載徽)와 이만식(李萬軾), 그리고 이봉환의 이웃에 사는 유생 정석오(鄭晳吾)도 유배를 보냈다.

이를 최익남의 옥사라 하기도 하고, 경인옥(庚寅獄)이라고도 한다.

이때 화를 당한 이봉환의 가문은 삼대(三代)에 걸쳐 모두 문집을 남긴 서얼 명가였다. 이봉환은 18세기의 날카롭고도 새로운 시풍으로 서얼(庶孼)의 시체(詩體)라고 평가되는 ‘초림체’(椒林體)를 창안한 사람이었다. 그의 학맥은 아들 이명오(李明五)와 손자 이만용(李晩用)으로 이어졌다.

이봉환은 어릴 적 장동김씨 가문의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로부터 사숙(私淑)하였기에 그 영향권에 있었다. 그는 1733년(영조 9)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1748년(영조 24) 홍계희(洪啓禧)와 같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가 관료로 진출한 것은 홍봉한의 역할이 컸다. 1765년(영조 41) 홍봉한이 그를 남옥·성대중과 함께 서얼 출신 인재로 추천한 것이다. 당시 서얼 문사들은 한시에 섬세한 묘사와 사회에 대한 울분을 담았는데, 이를 초림체라 했다.

 

옥호정도(玉壺亭圖).옥호정은 서울 삼청동에 있던 김조순(金祖淳)의 제택이라고 알려졌으나 지금은 터만 있다. 김조순은 이곳에서 이봉환의 아들인 이명오(李明五) 등과 같이 선비들의 예원(藝苑)집단인 백련사(白蓮社)를 경영하며 문인들과 교유했다. 옥호정도는 백련사의 보금자리가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풍경화이다.
옥호정도(玉壺亭圖).옥호정은 서울 삼청동에 있던 김조순(金祖淳)의 제택이라고 알려졌으나 지금은 터만 있다. 김조순은 이곳에서 이봉환의 아들인 이명오(李明五) 등과 같이 선비들의 예원(藝苑)집단인 백련사(白蓮社)를 경영하며 문인들과 교유했다. 옥호정도는 백련사의 보금자리가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풍경화이다.

이명계(李命啓), 남옥 등 이봉환의 벗들도 모두 이 시풍을 좇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문학세계의 전반적인 특징은, 김창흡(金昌翕)과 육유(陸游)의 시 세계를 추종하였고 서정성이 강한 시를 지었다. 이들의 시풍은 이후 백탑시파(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살았던 북학파 시인)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박지원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문(文)에 있어서는 당송고문(唐宋古文)의 경향을 띠었다.

이봉환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시를 배워 시사(詩史)에 능하였다. 그중에서도 차남인 이명오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봉환의 손자이자 이명오의 아들인 이만용도 시문(詩文)을 잘 해서 조선 후기 사대가(四大家)로 뽑히며 명성이 자자했다.

현재의 서울 삼청동 133-1과 2번지 일대에 옥호정(玉壺亭)이 있었다. 이 집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金祖淳)의 별장이었다. 김조순은 이곳에서 선비들의 예원(藝苑)집단인 백련사(白蓮社)를 경영하며 이명오를 비롯한 김이교(金履喬), 이복현(李復鉉), 김려(金鑢), 김이양(金履陽), 신위(申緯) 등과 교유했다.

이처럼 주목받던 이봉환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정쟁(政爭)의 중심으로 쓸려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의 다섯 아들들도 연좌되어 다섯 군데로 뿔뿔이 흩어져 귀양을 갔다. 이때 장남 이경오가 장기(長䰇)로 오고, 차남 이명오는 전라도 강진현으로 갔다.

그 후 이봉환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죄를 신원하기 위해 벌인 노력은 눈물겹다. 아버지가 물고당한 것을 원통히 생각하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길거리에 거적을 깔고 옷을 바꾸어 입지 않고, 왕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수차 탄원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아들과 손자들은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경화세족(京華世族·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 들과 끊임없이 사귐을 맺었다. 한양 일대에서 활동한 양반들 가운데 이들 삼대의 시문집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사람은 명사(名士)가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명오의 시문집인 <박옹시초(泊翁詩抄)> 첫머리에는 홍취영(洪就榮), 김좌근(金左根), 정원용(鄭元容), 조두순(趙斗淳), 윤정현(尹定鉉), 김병학(金炳學), 남병철(南秉哲) 등의 경화거족(京華巨族·화려한 서울의 재력가)들이 쓴 서문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는 김정희, 신위, 정학연 등과 주고받은 시가 적잖이 수록되어 있어 이들과 교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 중 특별히 정학연(정약용의 아들)과 함께 지은 시가 많이 보여 두 사람의 친분을 짐작케 한다. 이봉환 가문이 비록 서얼 출신이지만 그 위세가 여느 사대부 문벌가 못지않게 대단했음을 짐작케 하는 증거들이다.

이런 자손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1804년에 들어서 정조는 이봉환을 신원(伸寃)·표창(表彰)하고 그 자손들을 서용하겠다고 약속하면서, 25결(結)이라는 토지까지 하사했다. 정조는 이명오의 문집을 들이라 명하고, 아울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와 주자(朱子)의 글을 가려 뽑아 바치게 했다. 그만큼 이명오의 글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1809년(순조 9) 김이도(金履度)·김조순 등의 도움으로 이봉환은 신원이 된다. 1910년(순종 3) 순종은 죽은 이봉환을 정2품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였다가 다시 충정(忠正)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자 이명오는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고, 벼슬이 종3품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죄로 연좌되어 장기로 왔던 이명오의 형 이경오는 1772년(영조 48) 유배가 풀렸다. 그가 장기에서 머문 기간은 약 2년간이었지만 한양에서 당시에 유행했던 초림체(椒林體)의 한시들을 장기 땅에 마음껏 펼쳐놓고 갔다. 그에게 장기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을지도 모르지만, 장기사람들에게 그는 신문학의 전달자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자였던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