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쇼팽(1810-1849)

말년의 프레데릭 쇼팽.

쇼팽은 처음 바르샤바를 떠난 후 비엔나에 정착했으나 러시아 제국주의와 동맹이었던 비엔나 사람들은 쇼팽이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저항한 국가의 작곡가’라며 그의 음악을 외면했다고 한다. 그 후 프랑스 파리로 음악 활동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 후 쇼팽이 영국을 방문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비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게 됐다. 쇼팽은 망명자 신분이었던 것이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폴란드가 러시아의 식민지이므로 쇼팽만 인정한다면 ‘러시아 국민작곡가’로 선정해 러시아 비자를 발급하겠노라는 제의했으나 쇼팽은 단호히 거절했으며 이에 러시아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령’이 선포돼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쇼팽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만은 그의 작품으로도 알 수가 있다. 폴란드의 민속춤인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를 피아노곡으로 활용해 전 세계에 폴란드의 음악을 알렸으며 그가 창시한 피아노 장르인 ‘발라드’는 일정한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 서사적이며 스케일이 큰 곡인데 이것은 폴란드의 애국시인 ‘아담 미키에비치(1798∼1855)’의 애국시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쇼팽의 작곡 능력이 절정에 달하던 당시 유럽은 벨리니(1801∼1835)와 로시니(1792∼1868))의 오페라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정치적 이유로 폴란드에서 망명한 주위의 많은 이들이 쇼팽에게 애국적인 오페라 작품을 쓰길 권했지만, “나의 눈과 머릿속에는 오직 피아노건반 만이 보인다”고 말한 그의 말처럼 흥행을 뒤로 한 채 피아노만을 위한 새로운 음악세계를 고집스럽게 만들어 낸 것이다.

쇼팽은 그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프란츠 리스트(1811∼1886)와 자주 비교된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두 사람이다. 리스트는 잘생긴 외모를 과시하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할 때 청중들에게 최초로 옆으로 앉아 연주를 시도한 슈퍼스타적 기질이 많은 인물이었다. 리스트의 작품들은 개인 감성의 표현보다는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 연주법으로 일관돼 있으며 여인들과도 숱한 스캔들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쇼팽은 리스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일생을 통해 연주회는 50여회 밖에는 출연하지 않았고, 주로 소규모 모임의 살롱연주를 선호했다. 쇼팽의 음악은 구상된 작품이라기보다 현재의 감정을 표현해낸 즉흥적인 느낌의 곡이 많다. 그런 느낌을 가져야 효과적으로 연주할 수 있다.

그의 피아노곡은 오케스트라나 다른 악기 편성을 위해 편곡을 통해 바꿔 놓으면 그 근본적인 악상이 손상되며 그 음악이 지니는 특수한 정서가 없어진다. 쇼팽에게 악상은 음악의 흐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만이 가장 효과적으로 연주될 수 있게 작곡 되어진 것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과 비슷한 ‘레 실피드(Les sylphides)’라는 발레곡이 있다. 쇼팽의 피아노곡만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발레곡인데 편곡은 글라주노프(1865∼1936)가 담당했으며 줄거리는 없다. 이 곡을 감상하면 쇼팽의 작품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함에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근대적인 형태의 최초의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는 ‘에튜드 op.25 no.11’일명 ‘겨울바람’을 두고 “오케스트라로서 표현할 수 없는 피아노로서의 가장 완벽한 곡”이라 평했다.

쇼팽은 에튜드, 프렐류드, 발라드, 왈츠,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녹턴 등의 피아노 형식에 특화된 장르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천재적인 창의성과 감수성으로 피아노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기법과 ‘템포 루바토’나 ‘헤미올라’ 등 특유의 릴렉스 기법을 통하여 피아노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고국을 떠나올 때 불안해했던 그의 예감대로 쇼팽은 죽을 때까지 고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했으나 그의 심장만은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그의 위대한 대작 ‘프렐류드의 op.28 no.4, e minor’ 가 오르간으로 쓸쓸히 연주됐으며, 그가 존경하던 J.S.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을 오마주하며 만들어낸 그의 작품, 전주곡처럼 그의 생도 너무나 짧았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