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 일기‘·‘일성록’서 발견
울릉도 부속도서 인식한 정조
영토비 건립 제안 수용 않아

조선 정조 때 예조 정랑인 이복휴(1729∼1800)가 독도에 영토비를 세우자고 건의한 사료가 발견됐다.

10일 경북도에 따르면 독도사료연구회가 발굴한 자료는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정조 17년(1793년) 10월 1일자 기사로 이복휴가 우산도를 ‘울릉외도(蔚陵外島)’라 칭하고 영토비를 건립해 우리 땅임을 증명하자는 내용이다. 승정원일기에는 “울릉외도는 그 이름이 송도(松島)로 바로 옛날의 우산국입니다.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나무사자로 섬사람들을 겁주어 항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만일 송도에 비를 세워 이사부의 옛 자취를 기술한다면 그 섬이 우리나라 땅임을 증빙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일성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렸다. 연구회 소속 유미림 박사(한아문화연구소장)는 이복휴가 말한 울릉외도는 오늘날의 독도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기사에 나오는 우산국은 ‘동국문헌비고’(1770)에서 울릉도와 우산도 모두 우산국 땅이라고 기록한 것에 근거한 것으로 봤다. 또 마쓰시마(松島)는 당시 일본인들이 우산도를 부르는 명칭으로 울릉외도가 바로 송도라고 했으므로 울릉외도와 송도, 우산도는 같은 의미라는 공식이 성립한다고 밝혔다.

유 박사는 울릉외도라는 명칭이 이복휴의 건의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렇게 칭한 이유는 우산도보다 울릉도의 속도임을 잘 드러낸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그는 이 사료를 보면 울릉외도라 일컬어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도서임을 분명히 나타냈고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을 예상해 대응책을 강구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조선의 관료가 영유권 확립을 구상한 것은 조선 정부가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사례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조는 영토비 건립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유 박사는 이에 대해 “수토(搜討)제도가 정착해 울릉도 및 속도에 대한 영유권이 확립돼 있었다고 인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경북도 독도사료연구회는 2010년 발족해 지난해까지 일본사료 21편을 번역·출판했고 올해부터 국내사료를 번역하고 있다. 올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에서 울릉도·독도 기사를 발췌해 번역하고 있다. 서장환 경북도 독도정책과장은 “이번 사료는 조선의 왕과 관료가 독도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훈기자

    이창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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