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동네 취미 미술 학원에 등록해서 가장 먼저 그린 것은 내 왼손이다. 왼손을 관찰해 그려보라는 미술학원에서의 첫 번째 과제는 내가 그동안 반 아이들에게 시 쓸 때 주변 사물이나 사건을 잘 관찰해서 써보라는 것과 같은 주문이었다. 이왕 시작했으니 잘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내 왼손을 그렸다. 다 그린 후 미술 선생님이 유심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손과 스케치를 잘 비교해보세요. 다르지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하는데 현욱 씨는 머릿속에 있는 손을 그렸네요. 검지를 자세히 보세요. 약간 굽어있는 부분이나 굵기, 손톱 모양이 닮았지요? 검지는 다른 손가락과는 다르게 잘 관찰해서 그렸어요.”

두 번째 수업은 사진을 거꾸로 놓고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수업이 머릿속에 있는 관념을 그리지 말고 눈에 보이는 대로 유심히 대상을 관찰해서 스케치하라는 주문이었다. 글쓰기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머리로 꾸며 쓰지 말고 보고 들은 것을 솔직하고 자세히 써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요즘 미술 관련 연수를 들으면서 르네상스 최고의 발명품은 안경, 나침반, 현미경, 인쇄술, 총, 지도 같은 것이 아니라 원근법이라는 얘기가 솔깃했다. 원근법은 거리감 있는 현실 공간을 기하학적인 방법으로 평면 위에 구성, 재현하는 기술이다.

원근법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태도 세 가지를 들었는데, 첫 번째는 세계를 관찰하는 고정된 시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신화나 신학이 아닌 경험주의적 태도로 세계를 직접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석하는 태도를 갖게 됨으로써 근대 과학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여러 분야의 지식이 융합되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이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원근법은 기하학에 대한 이해가 광학으로 이어져 미술의 표현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3차원을 2차원 위에 옮겨 놓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 바로 원근법이다.

15세기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 ‘멜랑콜리아 I’에 그려진 인물과 소품이 참 흥미롭다. 날개를 단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이 컴퍼스를 잡고 앉아 있다. 주변에는 원구, 톱, 대패, 망치, 시계, 저울, 종, 마방진이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수학적, 과학적 탐구와 예술적 표현이 서로 융합된 시기였다. 문학, 철학, 역사, 과학, 수학 등의 학문을 구별하지 않았다. 논어 위정편에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나온다. “군자는 한 가지에만 쓰는 그릇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맵찬 겨울바람처럼 수능 점수가 발표됐다. 고3이든 중3이든 학생들은 진로를 고민할 것이다. 취준생이나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날개 달린 르네상스 사람, 여러 그릇으로 쓰일 수 있는 군자가 되고 싶으면 문과, 이과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소신대로 선택할 일이다. 실패와 절망이 후회와 눈물이 결국에는 거름이 되는 게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