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동서로 분단된 베를린.

독일의 수도 베를린. 그곳에는 20세기 유럽의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다.

한때 베를린을 동과 서로 나누었던 이 문은 독일 분단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이념으로 충돌했던 두 세계의 분열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데 브란덴부르크 문의 역사적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독 사람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곳도 브란덴부르크 문이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가슴 벅찬 역사의 현장도 다름 아닌 이곳 브란덴부르크 문이었다.

브란데부르크 문의 역사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곳은 베를린으로 들어오는 열여덟 개의 관문들 중 하나였는데 드나드는 마차로부터 세금을 걷는 곳이었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2세의 명에 따라 1793년경 지금의 모습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만들어 졌다. 건축가 카를 고트하르트 랑한스는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관문 ‘프로필라이아’(Propylaia)에서 영감을 받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만들었다. 아마도 건축가는 이 문으로 들어가 내딛는 베를린이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던 고대 아테네에 버금가는 도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브란덴부르크 문 꼭대기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승리의 여신 청동 조각상 ‘승리의 사두마차’가 장식으로 올라가 있어 기품 있고 위엄 있는 풍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 위품 있는 문을 통과한 개선장군은 프로이센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 ‘침략자’ 나폴레옹이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체코 남동부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에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듬해 10월 예나와 아우에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베를린 궁으로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전리품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장식하던 청동 조각상을 끌어내려 파리로 가져가 루브르에다 전시를 했다. 프로이센에게 이보다 더 굴욕적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승리의 청동상을 약탈당한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 후 8년 동안이나 초라한 모습으로 베를린을 지키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피해 동쪽 끝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로 도망했던 프로이센 왕실이 전력을 가다듬어 러시아와 연합군을 형성해 1813년 베를린을 수복하고서야 빼앗겼던 승리의 사두전차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33년 1월 30일 독일 공화국 총리로 임명된 히틀러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해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2만5천명의 나치당원들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횃불 퍼레이드를 펼치며 히틀러에 열광했다. 그리고 악마가 일으킨 잔혹한 전쟁의 결과 독일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1953년 동베를린에서는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반대하며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소련군은 탱크를 투입해 진압했다.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쌓기 시작하자 서독 시민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몰려나와 항의했다. 동독 정부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국경 검문소를 폐쇄했고 28년 동안 이 문은 열리지 않았다.

1963년 냉전의 불안 속에 떨고 있는 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베를린을 찾았고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은 같은 장소에서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를 향해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원한다면 이 문을 열고 장벽을 허물라고 외쳤다. 1989년 11월 9일 기적처럼 장벽은 무너졌고 2년 뒤 나뉘었던 독일은 다시 하나가 되었고 분단의 문은 통일의 문이 되었다.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