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새 학기가 되면 이름표를 만들고, 체육복과 교련복에 학교 마크, 이름을 새기기 위해 마크사에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리기에 마크사 앞에 장사진을 이루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포항에는 육거리 코주부사, 오거리 고려마크사가 유명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름표와 학교 마크를 재봉틀로 박음질하던 모습은 흑백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마크사 일감도 크게 줄어 고려마크사는 수년 전에 문을 닫았고, 코주부사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코주부사는 1953년경 중앙동 국민은행 건너편에 문을 열었다. 상호(商號)는 당시 신문지상에 인기리에 연재되던 만화 ‘코주부’에서 빌려왔다. 그동안 이사를 네 번 했지만, 육거리 인근을 떠나지 않은 육거리 터줏대감이다.

중앙아트홀 바로 옆에 있는 코주부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박영준 대표를 만날 수 있다. 1940년생인 박 대표는 1955년부터 코주부사에서 일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강이 안 좋아 2년 쉬었다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부터 64년 동안 불편한 몸으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당시 주인과는 양아들 같은 관계가 돼 1978년 코주부사를 물려받았다.

초창기 코주부사는 만물상과 같아 마크, 휘장은 물론, 체육복, 태권도복, 작업복 등 다양한 품목을 다뤘다. 1970년대 호황기에 일감이 몰려들 때는 열 명이 넘는 직원을 두기도 했지만, 이제는 물려줄 사람도 없는 처지가 됐다. 박 대표가 재봉틀을 돌릴 기력이 없게 되면 간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코주부사에 간간이 활기가 돌 때도 있다. 이따금 일감을 들고 오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이웃 주민들이 찾아와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 구실을 하는 덕분이다.

박 대표는 중학생 때 처음 만졌던 일제 주키(JUKI) 재봉틀을 아직도 돌리고 있다. 수많은 학생들의 이름표를 새겼으니 돈을 꽤 벌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면, 아이들 코 묻은 돈을 받았는데 벌면 얼마나 벌었겠느냐며 딸 둘 키운 걸로 만족한다고 답한다.

포항 원도심에는 코주부사 외에도 50년 된 포항이발소, 40여 년 된 동아세탁소, 할매떡볶이 같은 노포(老鋪)가 있다. 이 오래된 점포의 주인들은 소소한 기술과 성실한 노동으로 어렵게나마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웠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 톨의 씨앗도 품기 어려웠던 폐허에 힘겹게 실뿌리를 내리며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인생의 황혼에 이른 노포의 주인들을 만나 삶의 여정을 들어보면, 진정한 역사는 이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생명력이 서로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한평생 지켜온 점포가 작은 박물관이고, 이들이 사용해온 재봉틀, 이발도구, 요리도구가 역사 유물이며, 이들이 웃음과 슬픔을 버무려 풀어놓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책이 아닐까. 지역 공동체의 정서와 문화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애틋한 삶을 잘 갈무리해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궁리해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