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아 간호사

찬 바람 부는 이 계절이면 커다란 양철통, 길쭉한 서랍 속 줄줄이 늘어선 고구마 생각이 난다. 잘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꾹 찔러보던 군고구마. 퇴근길 아버지가 들고 온 군고구마 냄새는 당신보다 먼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해마다 12월은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롭게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이 계절은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딱 한 달 남은 2019년, 나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올해를 시작하며 세운 계획은 잘 실천했을까? 요가와 헬스장을 끊었지만 결국 제대로 실천 못 하고 유효기한을 넘겨버렸다. ‘라푼젤’ 영화를 자막 없이 보며 공부하겠다는 야심 찬 영어 공부 계획도 라푼젤이 태어난 시점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멈춰 있다. 올해 읽을 책은 70권이라고 자신 있게 썼던 독서계획은 반도 채우지 못했다. 여행을 비롯 몇몇 소소한 계획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다이어리 속에 머물러 있다.

이뤄낸 목표도 있다. 아픈데 없이 건강하고 좋은 분들과 함께 쌓아온 추억으로 올해는 유난히 풍성한 시간이었다. 딸로 아내로 직장인으로 충실했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일은 한 해 동안 ‘나다움’ 찾는 여정을 시작한 점이다.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던 내가 ‘나다움’을 찾고자 노력한 시간은 2019년 내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38년을 살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에 가슴 뛰는지 모른 채 살았고 어떤 선택에도 ‘아무거나, 다 괜찮아!’ 말하곤 했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아해야 하는 줄 알았다. 좋아하는 음악도 좋아하는 색깔도 정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 취향에 나를 맞추며 살았다. 이랬던 나와 올해는 기어코 결별하고 싶었다. 이제는 ‘나’로 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수 있을까? 나다움을 찾는데 도움받은 경험을 소개한다.

첫째는 글쓰기다. ‘생각학교ASK’에 입학해 ‘어떻게 살 것인가?’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글쓰기를 하면서 묵은 감정을 토해내고 엉켜버린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해 내놓을 수 있었다. 글쓰기 시간은 상처 입은 나를 보살펴주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둘째는 차 마시기다. 차를 우려내 찻잔에 따르는 동작을 수행하고 있노라면 잠잠히 나와 마주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차의 깊고 따스한 향을 몸 전체로 스미게 해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곤 했다. 찻잔이 비워지면서 내 존재도 비워지고 가벼워지는 순간을 만났다.

셋째 명상이다. 아침, 저녁 10분 명상으로 마치 세수를 하는 것처럼 매일 나를 오염시키는 감정의 묵은 때를 벗겨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집중하면 투명하고 맑아지는 나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챙기는 과정을 통해 나는 ‘지금(now) 여기(here)’에 존재함을 깨닫는다.

넷째는 시 필사와 낭송이다. 처음에는 저질 문장력을 어떻게 고칠까 고민하며 시 구절을 쓰면서 좋은 문장을 익히려고 필사와 낭송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시를 늘 접하니 일상에 쌓이는 감정 찌꺼기가 자연스레 털어지고 버석거리는 메마른 마음은 어느새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느 분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들으며 철저히 나다움을 지켜내고 사랑하는 행위’가 곧 낭송이라고 정의했다. 살면서 내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낭송으로 듣는 내 목소리가 점점 내면의 목소리에 가까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답게, 진짜 나로 살아낸 한 해다. 그래서 12월을 맞는 마음이 가볍다. 이루지 못한 계획도 방황도 아름다운 추억도 ‘나’였음을 안다. 감사한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남은 한 달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련다.

법정 스님이 말했다. “삶은 순간순간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매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내 삶의 매 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