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불암 쉼터와 해우소. 진불암은 영천시 신녕면 치산관광길 404-1에 위치해 있다.

바쁘게 달려온 일상이 덧없어질 때, 숲길을 걸어보라.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잎 세례가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몸은 젖지 않고 영혼이 촉촉해져 어느 새 활기를 되찾게 된다.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가빠올 무렵이면 진불암 법구경이 마중을 나와 반겨주던 길, 한때 내가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길은 팔공산 비로봉을 향해 숲으로 이어져 있다.

바람보다 먼저 떨어지는 나뭇잎 아래를 걸으며 일상을 잊는다. 한때의 사랑과 우수, 너무도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젊음을 돌아본다. 욕망과 집착으로 눈이 멀었던 날들을 반성하고 작지만 빛과 같은 시간도 있어 흐뭇하다. 남은 생은 좀 더 베풀고 사랑하다 나뭇잎처럼 대지로 돌아가고 싶다. 인생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나를 돌아보는 일의 연속이다.

다리가 아파온다. 공산폭포의 시원한 물소리가 들린다. 낙수 소리, 낙엽 지는 소리 그리고 책 읽는 소리만큼 맑고 겸허하게 하는 소리가 있을까. 첨단 기기의 소음 속에서 벗어나 자연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발밑에서는 늦가을을 위한 시심(詩心)이 뒤척이고 나는 천천히 산길을 오른다.

마음에도 제법 낙엽이 쌓일 무렵, 길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지게 하나 만난다. 시멘트 길이 끝나고 자연 그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오솔길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반갑기보다 애잔하다. 속도와 편리함의 강박증을 벗어나 자연과 한 몸으로 살겠노라는 고독한 맹세 하나 보인다. 지게는 가볍고 견고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지만 모노레일이나 드론에게 숲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는 뚝심이 사랑스럽다.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를 스님과 불자를 떠올린다. 내 몸 편하기를 바라지 않고 불편함을 감내하며 묵묵히 수행으로 삼는 사람들, 구도와 명상, 깨달음의 길은 편리함을 좇아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쌕쌕거리던 숨소리가 잠시 부끄럽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릴 누군가를 생각하면 육신의 무게쯤이야 한낱 가랑잎에 지나지 않으리라. 깊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도 구도자가 된 기분으로 산길을 오른다.

진불암 가는 길은 삶의 길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부도 하나 외롭게 서 있는가 하면, 연인처럼 다정한 부도도 만난다. 크고 작은 염원을 담은 돌탑들이 이야기를 건네 온다. 숲이 돌탑을 지키고, 그 돌탑들이 또 숲을 지킨다. 허리 잘린 돌비석에 새겨진 ‘나무아미타불’은 희미해져 가고, 쉬어가는 순간조차 엄숙하다. 숲이 커다란 법당이고 나무와 돌, 지저귀는 새들이 부처님이다.

나도 모르게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 진언을 왼다. 떠듬떠듬 기억을 되짚어가며 읊조리다 보니 벌써 진불암이 보인다. 작은 법당에는 관세음보살 부처님이 반갑게 맞아 주실 것이다. 십여 년 전 친구 따라 어색한 삼배를 올렸던 그날의 첫인연을 기억하고 계실까?

진불암은 신라 진평왕(서기 632년)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고려 문종때 환암혼수 국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많은 선지식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도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비로봉 아래 있어 불자보다는 동봉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소박한 암자다.

잠시 혼란스럽다. 내가 기억했던 진불암은 간 곳이 없고 변화의 몸살로 진통 중이다. 기와가 얹힌 반듯한 돌담 아래 비탈진 채마밭을 파헤치고 무법자처럼 서 있는 포클레인, 그 옆에 들어선 태양광, 모든 게 낯설다. 법당문을 열자 관세음보살 부처님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유리문 밖으로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보인다. 적멸보궁으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고향집에 온 것처럼 허전하다. 아무도 없는 빈 절을 이곳저곳 둘러보는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심술을 부리며 따라다닌다. 요사채 주련으로 걸려 있는 함허득통화상의 게송이 눈에 들어온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세상에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며/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짧은 생, 무언가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게송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인데 나는 지금 절집에 와서 무엇을 구하는가.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진다. 주련 옆에 ‘누구든지 과일, 차 드십시오’ 하얀 보드판 위에 쓰인 글귀가 보인다. 맞은 편 천막 아래 일회용 커피와 종이컵, 커피 주전자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스님의 정성과 배려가 추위에 떠는 길손을 맞는다. 드나드는 등산객들을 위한 세심한 노력들, 넉넉하지 않을 절 살림에 불자와 비불자를 가리지 않고 나그네를 맞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담장 너머로 늦가을 팔공산 자락이 환하게 들어온다.

활짝 열린 공양간에 들어가 따끈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인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훈훈한 맛이다.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절, 그것은 곧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가도 편안한 암자, 진불암을 만나려면 훼손되지 않은 숲길을 한 시간쯤 올라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