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쇼팽(1810∼1849)

프레데릭 쇼팽의 초상화.

필자는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길을 걷더라도 잘 정돈된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보다 문패가 붙어 있고 대문에 녹이 쓴, 무엇이 나올지 모를 예측불허의 오래된 골목을 헤매기를 좋아한다, 경주의 첨성대 앞을 거닐자면 먼 과거에도 누군가가 나와 같은 자리에 서서 저 건축물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이 후에도 누군가 같은 자리에 서리라고 생각하면 세월의 무상함마저 느껴진다.

클래식 음악의 매력도 이와 비슷한데 오래전 누군가가 작곡한 것을 악보를 보며 연주한다고 생각하면 그 과정들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보다 ‘어떤 것을 경험했는가’를 더욱 중요시하며 자랑의 대상이 된다. 세월이 묻은 건물을 보거나 현재 상연되고 있는 뮤지컬 공연을 보고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기는데 먼 과거에 만들어진 작품을 직접 연주하고 그 곡을 만든 이의 생각과 느낌을 공유한다면 일반적인 체험에서 느끼는 간접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던 어린 시절, 유난히 만든 이의 감정이 느껴지는 곡들이 있었다. 바로 프레데릭 쇼팽의 음악이다. 쇼팽의 곡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다른 이들의 곡들과는 달랐다. 귀족적인 우아함과 도도함이 있었고 청년스러운 열정과 모험이 존재하였으며, 밤새 사랑에 이유없이 아파할만한 센티멘털함이 있었다.

쇼팽은 여러 가지 고뇌를 가진 외로운 작곡가였다. 그가 연주활동을 위해 폴란드를 떠나 오던 날(쇼팽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랑하던 여인(콘스타치아 글라도코프스카)과도 헤어져야 했으며 다시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즉 조국을 떠나는 것부터 결심이 쉽지 않았다. 친구들은 떠나는 쇼팽에게 조국의 흙을 선물하였으며 그의 예감처럼 살아생전에 돌아오지 못했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전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때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며 고국과 작별을 고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그 전 해에 1번보다 먼저 작곡되었지만 출판이 늦어져 번호가 뒤바뀐 것이다. 쇼팽은 ‘피아노 작곡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피아노 전문 ‘싱어송 라이터’이다. 쇼팽의 작품 중 피아노곡을 제외하고 나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곡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래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은 매우 귀한 오케스트라 작품의 곡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두 협주곡의 관현악 파트가 수준이 낮다고 평가하며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의뢰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지만 필자에게는 두 곡 모두 너무 아름다우며 청년 시절의 쇼팽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필자는 2번 협주곡을 더 좋아한다. 이유는 즉흥적인 쇼팽다운 특징이 더 많이 느껴져서이다. 하나 더 추천할 만한 오케스트라곡은 쇼팽 콩쿠르의 단골곡인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폴로네이즈 op.22’인데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바로 그 곡이다.

쇼팽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작곡가가 아니었다. 당시 조국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분할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쇼팽이 떠난 지 1주일 후 독립을 위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다. 그가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고민한 흔적이 그의 편지에서 발견되며 돌아가 독립운동을 실천할 용기와 의지가 없음을 부끄러워한 것 같다. 하지만 다음 해 7월 러시아에 의해 바르샤바가 다시 함락되며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 당시의 감정은 ‘에튀드 op.10 No.12 혁명’을 들으면 느낄 수 있으며 당시 쇼팽이 느꼈던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음악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포항예술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