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기 전의 두부. 연두부보다 더 부드러운 상태다.

두부는 진화한다. 딱딱한 두부에서 부드러운 두부로, 순두부 넣고 끓여 먹던 단순한 두붓국에서 닭고기나 해물이 들어가는 프리미엄 두붓국으로. 조선 시대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두부는 진화한다. 목은 이색(1328~1396년)의 시다. 제목은 ‘새벽에 한 수를 읊다’이다,

기름에 두부 튀겨 잘게 썰어 국을 끓이고/여기에 다시 총백(蔥白)을 넣어서 향미를 도와라/(후략)

기름에 두부를 튀긴 뒤, 잘게 썬다. 두부가 어느 정도 딱딱하지 않으면 힘들다. 목은 시대의 두부는 딱딱했다. 가늘게 썬, 튀긴 두부로 국을 끓인다. 부재료는 총백이다. 다른 부재료는 없다. ‘총백’은 파 혹은 파의 뿌리 부분이다. 대파가 없던 시절이다. 지금의 쪽파 정도였을 것이다. 파 뿌리를 익히면 단맛과 특유의 향이 살아난다. 왜 날두부를 썰어 넣지 않고, 튀긴 두부를 사용했을까? 아마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날두부보다는 튀긴 두부로 끓인 국물이 맛있다. 기름을 가열하면 맛이 도드라진다. 튀기면 썰기도 한결 편하다.

목은은 고려 말기, 조선 초기를 살았다. 고려 말에는 목은의 튀긴 두붓국 정도가 최고의 두부 요리였을 것이다.

조선 초기까지도 별다른 두부 요리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두붓국[豆腐羹, 두부갱]이다. 세종이 받아든 중국의 국서도 “두부를 정교하게 만드는 여인을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성종 때, 도깨비 같은 존재가 먹었다는 음식도 단순한 두붓국[豆腐羹, 두부갱]이다. 조선 초기 두붓국은, 두부만 넣은 단순한 것이었다. 부재료는 쪽파 정도다.

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 서거정(1420∼1488년)의 ‘사가시집_권40_윤상인(允上人)이 두부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에 실린 두붓국이다.

보내오신 두부, 서리보다 더 하얀데/잘게 썰어 국 끓이니 연하고도 향기롭네/부처 숭상한 만년엔 고기를 끊기로 했으니/소순이나 많이 먹어 가냘픈 창자 보하려네

소순(蔬筍)은, 푸성귀와 나물의 새싹, 대궁이다. 두부는 “잘게 썰어 국 끓였다”고 했다. 역시 평범한 두붓국이다. ‘부처’ ‘고기를 끊는다’고 했으니 채식이다. 소박하다.

두부, 두붓국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서거정의 시대를 지나 200여 년 뒤다. 유암 홍만선(1643∼1715년)의 ‘산림경제’는 소 백과사전이다. 여기에 ‘자연포법(煮軟泡法)’ 즉, 연포탕 끓이는 법이 나온다. 유암의 두부, 연포탕은 17세기 모델이다. 그 이전의 단순한 ‘두붓국[豆腐羹]’이나 그 후의 연포탕과도 다르다. ‘산림경제_2권_치선’ 중 일부다.

자연포법(煮軟泡法). 두부를 만들 때 꼭 누르지 않으면 연하다. 작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씩 꽂는다. 흰 새우젓국[白蝦醢汁, 백하해즙]을 물에 타서 그릇에 넣고 끓인다. 베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스며 나오게 한다. 그 속에 두부 꼬치를 거꾸로 담근다. 슬쩍 익혀 꺼낸다. 따로 굴을 그 국물에 넣어서 끓인다. 다진 생강을 국물에 타서 먹는다. 극히 보드랍고, 맛이 아주 좋다._속방(俗方)

서거정의 순수 채식 두붓국이 20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며 진화한다. 새우젓국과 굴이 들어가는, 제법 화려한 연포탕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내용의 끝부분에 있는 ‘속방’이란 단어다, 조선 시대 상당수 책은 근거를 밝힌다. 원나라 서적인 ‘거가필용’이나 우리 책 ‘향약집성방’에서 따왔다는 식이다. 속방은 ‘민간에서 취하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로는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않는, 그래서 유례가 없는 순수 우리식 방법’이다.

연포탕은 화려하게 변신한다. ‘산림경제’의 ‘자연포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시기다. 숙종 7년(1681년) 6월 3일, 조정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영의정 김수항이 여러 어사의 비리를 고발한다. 국왕 대신 지방의 실정을 조사하던 어사가 ‘비리, 적폐’로 몰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이날의 기사 제목은 ‘김수항이 비리 어사들의 처벌을 아뢰고(후략)’이다.

(전략) 영의정 김수항이 말하기를, “(중략) (어사) 목임일은 역마를 바꿔 탈 때 형장이 낭자하였으며, 또 본도(本道)의 찰방(察訪), 적객(謫客)과 어울려 산사(山寺)로 돌아다니며 놀았으며, 연포회(軟泡會)를 베풀기까지 하였습니다.”

목임일은 숙종 7년(1681년) 평안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암행어사는 말 그대로, 암행이 원칙이다. 어사 목임일이 ‘찰방, 적객과 어울려 산사에서 놀면서 연포회를 베풀었다’고 했다. 찰방은 조선 시대 역원의 관리 책임자다. 종6품으로 그리 낮지 않다. 이들은 지역의 도로를 관리하고 역이나 원의 시설, 인원도 관리했다. 암행어사는 암행이니,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마패를 보여주고 말을 구하고, 역원에 머물면 될 일이다.

연포회는 연포탕을 끓여 먹으며 노는 모임이다. 적객은 귀양살이하는 이다. 죄인이다. 암행어사가 현직 관리, 죄인과 연포회를 베풀었다. 터무니없다. 신분도 다 드러났을 것이다. 어사 목임일이 먹었던 연포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저 연포회를 베풀었다고 적었다. ‘산림경제’의 연포탕인지, 그 후 화려하게 변신하는 연포탕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연포회는 상당히 널리 퍼졌다.

남인이었던 목임일은 나중에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낸다. 이때의 ‘연포회 사건’이 이력에 그리 큰 흠이 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촛물두부. 두유를 일부 남긴 것이 촛물이다.
촛물두부. 두유를 일부 남긴 것이 촛물이다.

약 150년 후쯤에 다산 정약용이 남긴 시가 있다. ‘다산시문집_제7권’의 “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이다. 상당히 화려한 연포탕이다.

다섯 집에서 닭 한 마리씩을 추렴하고/콩 갈아 두부 만들어 바구니에 담아라/주사위처럼 두부 끊으니 네모가 반듯한데/띠 싹을 꿰어라, 긴 손가락 길이만 하게/뽕나무버섯 소나무버섯을 섞어 넣고/호초와 석이를 넣어 향기롭게 무치어라/(중략) 연포(軟炮)라는 이름은 우리 풍속을 따르더라도/빈한한 선비의 풍류로 이름을 높여 부르니/(중략) 철마산은 골짝 얕고 강물은 넓기도 해라/속히 그대 따라 이곳에 은거하고 싶네

이 시에는 두부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다. 다산은, “세속에서 두붓국을 연포(軟泡)라고 하는데 포(泡) 자가 너무 속되므로 지금 포(炮) 자로 고쳤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포(泡)’는 거품이다. 본질이 아니다. 쓸데없는 부분,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한낱 거품이니 ‘너무 속되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이 시를 쓴 시기는 19세기 초반이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고향 마재[馬峴, 마현]로 돌아왔다. 다산의 강진 유배는 1801년 11월부터 1818년까지다. 다산은 1836년 세상을 떠났다. 이 시는 고향에서 노년을 보낸 1818∼1836년 사이에 쓴 것이다.

철마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와 수동면 수산리에 걸쳐 있다. 다산의 고향이자 노년을 보낸 마재와 멀지 않다.

다산의 두부는 19세기 초반, 우리 선조들이 먹었던 두부다. 상당히 화려한 연포탕이다. 두부는 주사위처럼 네모반듯하게 잘랐다. 네모난 두부를 띠 싹에 꿴다. 국물에는 여러 버섯을 넣었다. 후추와 석이버섯도 넣었다. 국물의 바탕은 닭고기다. 인근의 여러 젊은 선비들과 푸짐한 야외 파티를 했던 모양이다. 닭을 다섯 마리나 준비하고 절 밑에서 놀았다. 시회(詩會)도 베풀었을 것이다.

다산의 연포탕은, 조금 뒤에 나온 책, ‘동국세시기’의 연포탕과 비슷하다. “10월 두부, (중략)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이면 이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고 한다.”

‘닭고기+두부’의 연포탕이다. 다산의 연포탕이 바로 조선 후기 화려한 연포탕이다. 부드러운 두부, 연포로 끓였으니 연포탕이다. 낙지는 없다. 닭고기와 닭고기 국물을 준비해서 마치 오늘날의 전골 혹은 샤부샤부 같이 데쳐서 먹었다.

교산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두부는 장의문(藏義門)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고 했다. 두부는 흔하지만 연한, 잘 만든 두부는 귀하다. 두부를 많이 먹지만, 새우젓국, 굴이나 닭고기 국물과 끓인 부드럽고, 맛있는 연포탕은 사라졌다.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