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기해(己亥)년도 어느덧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12월은 갈무리하는 달이다. 갈무리는 정리, 저장, 마무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한국어 대사전 예문으로 ‘어머니는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의 갈무리 때문에 바쁘셨다’나 ‘갈무리를 제대로 못 하면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로 쓰인다. 12월은 ‘시작이 반이다’보다는 ‘석 달 장마에도 개부심이 제일’이라는 속담이 어울린다. 개부심은 큰 장마가 끝난 후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퍼붓는 비를 말한다. 아주 새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 마무리가 중요함을 빗된 속담이다.

올 한 해 ‘책 읽어주기’ 강의를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선생님과 학부모와 아이들을 떠올려 본다. 지난주에는 경주 감포초등학교 학부모와 선생님을 만났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책 읽어주기 연수는 9시 30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쉬는 시간도 없이 책 3권을 읽어드렸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 고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집 <한 글자 사전>이 그 주인공이다. 언제나 그랬듯 책 읽어주는 시간은 순수한 웃음과 따뜻한 공감이 넘치는 시간이다. 책 읽어주는 시간은 재미와 감동, 눈물과 성찰이 촛불처럼 타오르는 시간이다. 자신과 타인과 가족과 세상을 동시에 발견하는 시간이다. 아,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함께한 그리운 이들에게 축복을!

많은 부모가 자녀를 책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한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줄 안다. 그렇지 않다. 방법이 아니라 실천만이 있다. 집에 책이 많으면, 교실에 학급문고가 많으면, 학교도서관이 훌륭하면, 공공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면, 자녀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한 것뿐이다. 책이 많다고 도서관이 좋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책 읽어주기다. 뉴먼(Neuman)의 연구에 따르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생후 6개월 정도부터 낮잠을 잘 때나 잠자리에서 부모가 매일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 이야기에 대해 토의하는 활동을 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한다.

부모와 교사의 책 읽어주기는 우리 아이의 리터러시(읽고 쓰는 능력)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집이나 학교에서 꾸준히 책 읽어주기를 경험한 아이들은 독해력과 어휘력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잠자리에서 엄마나 아빠의 품에 안겨 책 읽어주는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아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교실에서 매주 책 읽어주는 선생님의 눈빛과 목소리는 아이의 영혼에 그대로 아로새겨진다. 책 읽어주기는 우리 아이에게 햇빛을 쫴 주는 것과 같다. 생명수를 떠 먹여주는 것과 같다.

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 책 읽어주기는 실천이 제일 어렵다. 강연장에서 만난 학부모와 교사들의 고충에 십분 공감한다. 퇴근하면 쉬고 싶다. 묵언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꾸준히 책 읽어주기를 실천하는 위대한 부모와 교사들이 있다. 그들을 보고 힘을 내자. 우리도 할 수 있다. 오직, 책 읽어주기를!